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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동예기(靑銅禮器)를 바라보면서 들었던 한 가지 생각           


 

 

   news  letter No.513 2018/3/13

 

 

 


       동아시아에서 청동기 문명국가로서 학계의 각별한 주목을 받아온 왕조는 단연 상왕조와 주왕조일 것이다. 신석기 혁명에 뒤이어 등장한 이른바 문명 단계의 지표로서 문자사용이나 도시의 발생 등을 거론하지만, 무엇보다도 금속 도구의 출현과 발전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상주시기 청동기의 수준은 이미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잘 드러난 바 있다. 그 중에서도 청동예기는 종류와 수량, 주조 방식과 기술 등에서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독자성과 탁월성을 보여준다.

  
       청동예기는 제사나 연회를 거행할 때 사용하기 위하여 만든 용기였다. 음식을 조리하거나 이미 조리된 음식을 담거나 혹은 술을 담는 용기도 있었고, 제사 과정에서 손을 씻을 물을 담는 그릇도 있었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익숙한 정(鼎)은 고기를 삶거나 국을 끓이는 데 사용된 용기였고, 작(爵)은 술을 담는 용기였다. 종류도 다양하였지만 규모도 천차만별이어서 큰 것은 1미터 이상이 되는 것도 있었지만 2~30센티미터에 불과한 소형 예기도 있었다. 상나라와 주나라 모두 정교한 청동예기 주조 기술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양식적인 측면에서 보면 상호 공유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이전에 없던 특성이 새롭게 부각되면서 양자의 차이성은 점점 더 커졌다.


       상주시기 청동예기는 20세기 이후 고고학의 시대가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지하 깊숙이 묻혀 있던 기물 창고나 구덩이, 무덤 등을 파헤쳐 상주시기 청동예기의 실상을 드러낸 것은 근대 고고학이 이룩한 성과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고대 유물이 근대 이후에 비로소 그 존재가 알려졌던 것은 아니다. 근대 고고학이 관여하기 전에도 청동예기는 우연한 기회에 지상으로 나와 자신의 존재를 알리곤 했다.


       상주 시기가 종식을 고한 후 한참 후인 기원전 116년 한나라 무제 때 언젠가 땅 위로 무슨 갈고리 같은 것이 돌출되어 있어 파보니 정(鼎)이 나왔다. 무제는 이 사건을 매우 상서로운 징조로 여겨 연호를 원정(元鼎)으로 바꾼다. 당시 예고 없이 찾아온 청동예기의 존재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범상치 않은 관심을 끌어들이고 급기야 연호의 개정을 통해서 시간의 흐름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를 거치면서 청동예기의 발견은 지속되었고 그것이 지닌 예사롭지 않은 가치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전통시기에 발견된 청동예기의 거의 절반 가까이가 위조품이라는 평가가 있다. 이 유물이 예전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끌 정도로 높은 가치를 지니지 않았다면 위조품을 만드는 따위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상서(尙書)》 〈주고(酒誥)〉에 보면 주나라 성왕 때 당시 섭정이었던 주공은 강숙이란 인물을 위나라 제후로 봉하면서 앞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는 특별히 술을 조심하라는 훈계를 내린다. 주공은 상나라가 천명을 잃고 망한 원인을 술에 지나치게 탐닉한 데서 찾고 이를 경계 삼으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그에 따르면 상나라 사람들이 처음부터 술독에 빠져 살았던 것은 아니다. 하늘의 버림을 받기 전에는 왕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덕을 밝히는 데 힘을 썼다. 그러나 마지막 왕에 이르러 술에 빠지는 바람에 모든 것을 잃게 된 것이다. 여기서 술은 개인의 안위를 넘어 국가 존망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렇다고 술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지는 않다. 주공은 술은 제사에만 쓰는 것이라는 단서를 달고 이런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성왕 다음으로 재위에 오른 강왕 때 지금은 ‘대우정(大盂鼎)’이라 명명된 청동예기가 제작되었는데, 이 용기 표면에 쓰인 금문(金文)을 보면 앞에서 소개한 내용이 주나라 당시에 실제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담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상나라가 천명을 상실한 까닭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술에 취했기 때문이다.” 상주시기 청동예기를 연구한 학자들 중에는 이와 같은 술 담론과 관련지어 비교연구를 진행한 사례가 있다. 이에 따르면 상나라 청동예기는 술그릇의 비중이 큰데 반하여 주나라로 넘어오면 점차 음식 그릇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나라 때는 제사나 연회에서 사용되었던 주기(酒器)의 종류나 수량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던 것이다.


       앞의 이야기는 문헌자료의 사실성을 고고학적 자료가 뒷받침해주는 수많은 사례 중 하나에 불과하다. 거꾸로 청동예기는 상주시기에 관해 문헌자료가 전하지 못하는 정보의 부족을 상당한 정도로 보완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청동예기의 등장으로 인한 정보의 확장은 문제를 해결해주기보다는 나에게 더 심각한 고민을 안겨주는 것 같다. 왜냐하면 앞의 경우를 예로 들어 말하자면, 국가의 성패를 술과 연결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 관한 의문은 청동예기가 전하는 정보로 인하여 해소되기보다는 오히려 더 강화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상주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에믹적(emic) 실재를 지금 여기의 연구자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에틱적(etic) 분석의 도구로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이는 고대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늘 던질 수밖에 없는 물음이지만 앞으로도 쉽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임현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최근의 논문으로 〈중국 고대 巫敎 인식에 관한 연구: 商代 巫의 사회적 위상을 중심으로〉, 〈상나라 수렵, 목축, 제사를 통해서 본 삶의 세계 구축과 신, 인간, 동물의 관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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