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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37호-조선시대 태(胎)와 땅, 그리고 돌의 문화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8. 8. 28. 17:23

                  조선시대 태(胎)와 땅, 그리고 돌의 문화
 

  

news  letter No.537 2018/8/28                  

 



  
  

 



       “태어날 때 자신의 신을 가지고 나온다”고 해야 할까? 국립고궁박물관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공동주최하는 “조선 왕실 아기씨의 탄생”(2018.6.27.~9.2)이란 전시를 준비하면서 느낀 결론이었다. 조선시대 왕의 자녀가 태어나면 아기를 따라 나온 태를 왕실에서 보관했다가 3일째 되는 날 100번씩이나 깨끗이 씻은 후 준비한 항아리에 넣고 봉하였다. 항아리는 크기가 서로 다른 두 개를 준비하는데 작은 항아리 바닥에 중국 동전 한 닢을 놓고 그 위에 태를 놓았다. 입구를 막고 뚜껑을 닫은 후 이를 큰 항아리에 넣고 항아리 사이에 솜을 넣어 고정시킨 다음 뚜껑을 닫고 끈으로 묶었다. 그리고 길한 날을 잡아 태항아리를 길지(吉地)에 묻었다. 이를 태실(胎室)이라 부르고, 태를 보관하는 것을 안태(安胎) 또는 장태(藏胎)라고 하였다. 태를 묻고 지내는 ‘태신안위제’에서 알 수 있듯이 태실의 주인은 태신(胎神)이었다.

       태신에 대한 신앙은 삼국시대까지 올라간다. 충북 진천군 태령산(胎靈山)에 김유신의 태실이 있으며 이후 고려시대 왕실의 태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왕자와 왕녀의 태실이 계속 조성되었다. 이러한 태실은 사후 무덤과 유사하다. 매장지 내부의 모습이나 규모에서 차이가 나지만 태와 유체(遺體)는 그 주인과 연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아기를 생성시킨 태반은 분리된 이후에도 아기의 장수와 건강에 계속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졌다. 태는 그 아기의 또 다른 몸일 뿐 아니라 아기를 보호하는 수호신이었다.

       그러나 태 또는 태신은 보이지 않는다. 땅 속에 감춰지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부패하여 사라진다. 오히려 더 시선이 가는 것은 태실의 땅과 돌이다. 태는 태가 묻힌 봉우리와 그 위에 조성하는 석물을 통해 드러날 뿐이다. 태신의 영험은 길지(吉地)를 만남으로써 힘을 얻는다. 복은 땅에서 비롯하였다. 태실에 적합한 땅은 풍수의 길지와 유사하지만 좌청룡, 우백호의 주변 산세보다 볼록 튀어나온 봉우리를 귀하게 여겼다. 태봉(胎峰)이란 이름 역시 쉽게 찾을 수 있다. 태실의 역사는 이 땅을 둘러싼 역사이다. 조선전기 태실의 길지로 선택된 곳은 궁궐에서 먼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이었다. 그러나 시기가 지날수록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태실을 조성하려고 했으며, 영조대 이후에는 원자(元子)나 원손(元孫)을 제외하면 궁궐 안 후원에 태를 묻었다. 태실을 보호하고 관리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 주변의 땅을 경작하거나 묘지로 사용하려는 백성들의 열망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경제적 가치를 넘어서 태의 영험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태항아리를 땅에 묻을 때 항아리만을 넣지 않는다. 큰 돌의 안쪽을 파내어 만든 석함(石函)을 먼저 땅에 묻고 그 안에 태항아리를 넣은 다음 석개(石蓋)로써 덮고 흙으로 갈무리하였다. 석실 앞에는 비석을 세워 태실임을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처음 석실을 만들 때에는 비석 외 돌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차후 왕이 되면 이 석실 위에 돌로써 바닥을 깔고 육중한 돌을 얹은 후 난간을 만들고, 그 앞에 큰 비를 다시 세워 국왕의 태실임을 표시하였다. 이를 가봉(加封)이라 하였다. 안태나 가봉에서 가장 힘든 것은 돌을 운반하는 일이다. 석함을 옮길 때 태 주인의 천수를 기원하여 천 명의 백성들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가봉을 위해서는 더 많은 공력이 필요하였다. 궁궐 밖 태실의 조영을 꺼렸던 이유 역시 민력(民力)을 동원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정조는 원자였던 순조의 태실을 만들면서 석함을 연석(軟石)이란 무른 돌을 사용하여 민력을 줄이고자 하였다. 가봉의 규모 역시 이전에 비하여 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의 권위는 돌을 통해 지속되었다.

       조선시대 왕과 왕자녀들의 태는 서삼릉 경내에 옮겨져 있다. 일제시기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기존에 태실이 있던 자리에는 석물만 남아있다. 온전한 형태를 갖춘 것도 있지만 대부분 원형을 잃어버리고 망실된 것이 많다. 왕의 권위를 보여주던 석물은 권력의 무상함을 보여주면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였다. 남아있는 태가 없듯이 태신도 없지만 땅에 남기고 돌에 새긴 신앙의 흔적을 찾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다 쓰고 나니 우리 딸 생일이 오늘임을 알았다. 무엇으로 사랑을 전할까?

      

 
이욱_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주요 저서로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조선왕실의 제향 공간-정제와 속제의 변용》, 《조선시대 국왕의 죽음과 상장례-애통•존숭•기억의 의례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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