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letter No.540 2018/9/19
‘민족’의 명절 추석 한가위를 앞두고 올해 3번째로 열리고 있는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오늘 ‘핵 없는’ 한반도에 대한 남북의 의지를 천명하고 군사적 적대관계 해소, 교류협력을 위한 구체적 실천방안을 협의한 9.19 평양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분단의 상흔으로 점철되어 있고 뼛골에 사무친 통한의 세월을 살아온 이들이 다름 아닌 내 가족, 친지, 이웃이기에, ‘우리’라는 말이 새삼 뭉클하고 ‘평화, 새로운 미래’라는 슬로건에 기대를 걸며 지난 4월 찾아온 한반도의 봄이 지난 여름의 무더위처럼 난제들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미래를 여는 결실로 맺어지길 가슴 조이며 지켜보게 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분단 상황 속에 잃어버린 자유와 평화의 가치, 민족주체성을 회복하는 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제, 평화와 번영이라는 미래지향적 대의보다도 당장 내 삶에 영향을 주는 집값과 세금, 물가, 청년실업률, 고용불안, 경제성장률 등 경제 현안이 더 중요한 게 아니냐는 냉랭한 시선도 존재한다. 비핵화와 종전선언, 남북 평화체제와 교류협력, 혹은 통일이라 해도 지금 고단하고 팍팍한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겠느냐 라는 관점이다.
북한의 핵실험과 대북제재강화로 전운마저 감돌던 상황에서 전격적으로 남북 관계개선과 평화공존을 모색하는 이러한 새로운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은 북한을 위험하고 믿을 수 없으며 극복해야할 ‘적’으로 보느냐, 화해해야 하고 공존할 수 있는 ‘우리’ 민족으로 보느냐에 따라서도 첨예하게 갈리는 것 같다. 동족 간에 피를 흘리고 원한을 쌓은 한국전쟁의 상처는 휴전 이후 군사적 대치 속에서 더 심화되어 종전의 조건과 의미에 대해서도 견해차가 적지 않다. 남북관계는 근대 국가 간의 정치 군사적 문제며 동시에 민족적 정서적 사안인 것이다. 남북은 휴전 중인 적국이기도 하지만, 내전 중인 동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복합적 국면에서 ‘우리’, ‘한 민족’, 동포, 겨레라는 ‘오이코스(oikos)적 모티브는 양가적인 작용을 하는 것 같다. 배신과 원한을 자극하여 갈등의 골을 깊게 하기도 하지만, 극적 화해의 틀이 되기도 한다.
불화(diaphora)의 유형으로 전쟁(polemos)와 내전(내분, stasis)을 구분한 고대 그리스의 용례에서, 전쟁은 남인 이민족에 대한 적대심과 불화를, 내전은 친족 및 동족 사이의 적대심과 불화를 지칭했다.(플라톤, 《국가·정체》 5권 470b) 흥미로운 것은 전쟁이 상대의 예속이나 파멸을 의도하는 반면, 혈족, 즉 오이코스 내의 전쟁으로서의 내전은 ‘화해하게 될 사람들로서 불화’하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는 점이다. 이때 사적인 영역인 오이코스(친족)는 폴리스의 파괴를 초래하는 분할과 내전의 원천인 동시에 폴리스의 통일을 재구성하기 위한 화해의 패러다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조르조 아감벤, 《내전: 스타시스, 정치의 패러다임》,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7, 34) 사적이고 특수한 것이 아닌 공통의 관심사를 통한 화해가 곧 폴리스의 정치적 사안인 것과 오이코스의 이러한 양의성을 함께 생각해보면, 오이코스와 폴리스의 단순 대비, 폴리스 속에서 오이코스의 극복, 공적인 것에서의 사적인 것의 극복, 일반성 속에서 특수성의 극복만으로는 폴리스의 정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음이 명백해진다. 아감벤은 내전을 오이코스와 폴리스 사이에 위치시킨 이와 같은 니콜 로로(Nicole Roraux)의 연구를 토대로 자체 내에 불화와 스타시스를 포함하고 있는 오이코스가 어떻게 화해의 모델로 나타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정치의 패러다임에서 내전 즉 스타시스의 위상학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간파하여 말한 바 있다. 내전 즉 스타시스는 가정(오이코스)에 속하는 것이 시민성 속으로 정치화되며, 역으로 시민성이 오이코스의 연대로 탈정치화되어 들어가는 문턱이며, 오이코스와 폴리스 사이에서 정치적인 것과 비정치적인 것, 외부와 내부가 겹쳐지는 비식별역을 표시한다는 것이다.(위의 책, 40-41, 47)
그리스의 내전에 대한 이러한 연구를 남북한의 분단 혹은 내전 상황과 ‘한반도 정치’라는 새롭게 부상하는 패러다임에서 작동하고 있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당파적이고 당위적인 복합적 노선들에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