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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등한 인간(Homo Equalis), 사실인가 몽상인가?
            -『숲속의 평등』을 읽고


 news letter No.734 2022/6/21

 



      내가 노장사상에 이끌리게 된 중요한 지점은 평등주의적 사유이다. 특히 『장자』는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의 본질적 평등, 즉 제물(齊物)을 주장한다. 근대 이후에야 평등이라는 주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을 생각하면 매우 선진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노자와 장자는 사회적 차별과 서열화에 대해 비판하고 이러한 차별의 근거가 되는 인식과 가치기준의 모순과 한계를 지적한다. 또한 도(道) 자체, 그리고 도의 속성이자 작동원리인 자연(저절로 그러함)이 곧 평등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노장사상을 수용하여 성립된 후대의 사상체계나 교단, 혹은 수행이론 중에는 자연과 도를 위계질서의 근거와 원리로 파악하는 예도 많다. 예컨대 위진현학은 명교(名敎)적 위계질서의 확립을 위한 원천으로서 노장사상을 채택하였다. 또한 후대 도교교단에서는 철저한 위계적 형식을 통해 도사들에게 자격을 부여하고 근기에 따른 차별적 수행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물론 도교교학에서 이른바 위계는 기본적으로 각 사물과 사물의 본체이자 근원인 도(道) 사이의 거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위계는 차별이 아니라 질서이며 이 질서의 근원이자 기준은 도와 자연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위계가 도에 따른 질서라는 논리는 위계가 없는 평등을 무질서에 배열시키는 위험을 내포한다. 물론 이러한 위계는 종교적인 맥락에서 통용되며 정치경제와는 구분되는 것이며 그 위계가 고정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위계의 층차가 권력의 층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종교적 위계는 불평등과 차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는 할 수 없다. 질서와 안정을 표방하는 위계가 우리에게 불안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것이 언제나 암묵적으로 폭력적 차별을 그 안에 배태하고 있었던 경험 때문이다.

    평등은 (적어도) 근대 이후 인류사회가 추구하는 가장 보편적인 가치이며 인간사회에서 중요한 가치이며 이상이다. 그리고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사회제도 장치의 측면에서는 평등의 가치가 옹호되고 실현된 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여전히(혹은 더욱 심하게) 우리들의 사회에는 불평등이 감지되고 우리의 일상은 불평등에 대한 불만과 비판으로 소란스럽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기치 아래 평등을 가장하는 매우 정교한 정치적, 경제적 장치들이 개발되어 교묘하게 사회의 불평등을 구조적으로 정착시켜 억울함도 호소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아니 본인이 당하는 불평등이나 억압에 대해 감지하지도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평등을 희망하지만 실제의 삶은 심각한 불평등을 겪는다. 루소(Rousseau)의 말대로 자연은 구조적으로 인간을 불평등과 위계에 놓고 있는 것인지, 노자가 말하는 자연의 질서는 평등이 아니라 오히려 위계적 질서는 아닌지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과 인간은 본래 위계적인가 아니면 평등주의적인가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멈추기 힘든 이유이다.

    평등주의를 표방하는 다양한 제도적 장치 뒤에 기술적으로 은폐시켜 더욱더 확고하게 현대 사회에 자리잡은 불평등과 차별적 위계를 보면서 나는 인간은 그래도 평등주의를 지향하는 존재라고 하는 희망적 메시지가 그리워 평등주의에 대한 글들을 한동안 찾아 보았다. 그러던 차에 1년 전 한 저서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숲속의 평등』(김성동 옮김, 토러스북)으로 번역된 크리스토퍼 보엠(Christopher Boehm)의 Hierarchy in the Forest: The Evolution of Egalitarian Behavior이다.

    『숲속의 평등』은 평등주의(egalitarianism)에 대한 진화론적 기원을 모색하고 있는 일종의 인류학적 보고서로서 수렵 채집단계에서 작은 부족을 형성하며 생활하던 인류가 위계적 본성을 극복하고 어떻게 평등적 관계를 수립해나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생물학과 교수이자 제인구달 연구센터장인 저자, 보엠(Boehm)은 남극에서부터 미 대륙, 호주, 아프리카 등에 이르는 광범위한 민족지 문헌을 바탕으로, 초기 인류인 수렵 채집인과 부족민들이 고도로 정교한 평등주의 문화와 제도를 발전시켰다고 말한다. 그는 인류가 고대 이전부터 평등주의자로 살았으며, 그것이 현대인의 유전자 속에도 흐르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은 얼마 전 한국종교문화연구소의 “책 한권 읽기” 프로그램에서 임현수 선생님이 소개한 루이 뒤몽(Louis Dumont)의 『위계적 인간(Homo Hierarchicus)』, 그리고 그의 동반저술서인 『평등한 인간(Homo Aequalis)』의 주제와도 무관하지 않은 저술이다.

    보엠은 제인구달 연구센터장답게 침팬지, 보노보, 고릴라와 같은 동물집단으로부터 초기 인류, 곧 수렵채집인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 인간은 천성적으로 평등주의적인가 혹은 위계적인가 또는 이타적인가 이기적인가를 규명하고자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인류가 어떻게 위계주의적 욕망을 극복하고 사회적 정치적 측면에서 평등주의적 행동으로 진화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진화론적으로 인류와 가까운 유인원 집단이 인간보다 더 위계적이며 침팬지 집단의 권력자의 지배는 인간사회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에 주목하여 왜 수렵채집인의 사회가 유인원 집단보다 평등한 경향이 있는지 그 이유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이 책을 저술하고 있다. 한 가지 가능한 답은 인간이 성격(personality)적으로 유인원보다 더 평등하다는 것인데 보엠은 이러한 생각에 대한 많은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는 침팬지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이 권력을 좋아하고 반대로 지배받기를 싫어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부족사회가 유인원 사회와는 완전히 다르게 평등한 방식으로 조직된 것도 아니고 기본적인 수준에서 두 사회는 모두 동일하게 피라미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유사한 역학에 의해 지배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지배 역학구조에서 가능한 유형 중에 주목할 만한 유형이 초기 인류 집단사회에 등장한다고 한다. 보엠이 “역지배 위계질서(역전된 지배 위계, reverse dominance hierarchy)”라고 부르는 유형이다. “역지배 위계질서”란 평등하고 안정적인 사회 구조로 이행하기 위해 위계 피라미드의 가장 하층부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결속하여 잠재적인 우두머리(potential master)를 지배하는 방법을 계획적으로(deliberately) 고안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회에도 지배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러한 역지배적 위계가 하층부로부터 집단적인 형식을 통해 지속적으로 시도되고 유지된다는 것이다. 즉 평등주의적 사회구현이 권력의 상층부가 아니라 하층부, 곧 피지배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이다.

    보엠에 따르면 인류 역사의 초기 단계에서도 권력을 추구하는 강자들이나 탐욕스러운 이기주의자들, 공격적인 탈법자들은 끊임없이 등장하였고 따라서 그 집단의 유지를 위해서는 이들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통제를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제재-예컨대 여론, 비판, 조롱, 혹은 발사무기(projectile weapon)와 같은 도구-를 마련하여 평등주의를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의 제재수단 이상으로 평등주의적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은 피지배자들 사이의 신뢰이며 안정적인 사회적 유대와 의사소통이 인간사회가 오랫동안 평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조건임을 보엠은 말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구석기 시대의 평등주의의 전파가 자연선택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인간 본성에 심중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인간 안에 내재한 유전적 이타주의의 진화가능성, 즉 인간에게 이타주의적 특성들이 자연적으로 선택되었다는 가설을 조심스럽게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가설이 다소 학문적으로 위험해 보이고 저자 자신도 공격받을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렇듯 대담한 가설을 채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평등주의적 행동은 이타적 심성이 전제되어야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대범하고 다소 거친 논의와 가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학문적 설득력 여부를 차치하고 나는 멈춤 없이 이 책을 읽어나갈 수 있었다. 진위 여부를 떠나 믿고 싶은 내용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비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이며 몽상적인 인간이다. 그래도 나는 믿고 싶다. 아니 믿고자 한다. 힘은 없지만 다수의 사람이 함께 연대하여 소수의 권력자에 항거하고 나란히 손잡고 공존하는 방향으로 진화했으며 진화해갈 것을.

 

 

 

 

 

 

 

 

 

 


최수빈_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강사
논문으로는 <전진교 출가도사들의 수행과 사회활동에 반영된 근세개혁도교의 일 면모>, <도교경전에 나타난 우주창조론의 특성 및 도교사적 의미 분석>, <천서(天書)인가 인서(人書)인가 - 도교 경전의 특수성과 대중화 문제에 대한 소고 ->, <중세도교의 자연개념 고찰-위진남북조 시대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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