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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736호-노란 채송화, 그리고 우물과 왕잠자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2. 7. 12. 14:53

노란 채송화, 그리고 우물과 왕잠자리

news letter No.736 2022/7/12

 


            



      요맘때였을 것이다. 냄새나고 누추한 청계천변의 옷 수선집에서 그가 녹슨 깡통 속에 핀 그 꽃을 보게 된 것은 여름이 한창인 요즘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휴전 직후. 내전이고 국제전이기도 한 전쟁이 터져, 남과 북의 군대가 일진일퇴를 하면서 그 사이에 휩싸인 백성들이 톱질 당하듯 혹은 맷돌에 갈리듯, 살육되던 광경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던 때. 그리고 전쟁이 멈추자 그동안 밖의 적을 향해 퍼붓던 적개심이 손쉬운 대상을 잃고, 안으로 방향을 바꿔 서로를 증오하던 살벌하던 때. 어렵사리 구한 옷을 수선해 입으려고 그가 골판지로 뼈대를 세워 만든 가게에 간다. 낮인데도 안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옷 수선이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눈이 적응하여 주위를 식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문득 가게 창문을 바라보며 그가 발견한 광경.

  “그리고 순간 저는 한 송이 노란 채송화가 거기 피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갑자기 집안이 환해졌습니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마음이 저리게 아프면서도 어떤 외침에도 담지 못할 감동이 온몸에 흘렀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저는 어떤 언어에도 담지 못합니다. 그 꽃은 제게 아름다움이었는데, 아니 그것을 넘어 ‘전율’이었다고 하고 싶은데, 그것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저는 누가 아름다움이란 무어냐고 물으면 서슴지 않고 ‘노란 채송화’라고 말할 겁니다. 까닭을 되묻겠죠. 그러나 저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을 겁니다. 내 아름다움이 하마 다칠까 두려우니까요. 누가 거룩함이 무어냐고 물으면 저는 아예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을 겁니다. 현학(衒學)의 소용돌이는 참으로 견디기 힘드니까요. 하지만 만약 하느님이 거룩함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서슴지 않고 말씀드릴 겁니다. ‘노란 채송화’라고. 저는 하느님께서 그 까닭을 되묻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 몸이 그렇게 반응하니까요.”1)

    위의 글을 읽고 난 후, 아무렇지 않은 듯이 딴 생각을 하거나, 다른 작업을 하기란 쉽지 않다. 노란 채송화의 이미지가 이미 마음을 가득 채워버려서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숨을 고르게 되기 때문이다. 마음이 먹먹해지는 그 음미의 시간이 지난 후에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나에게도 노란 채송화가 있을까? 나의 노란 채송화는 무엇인가?

    하지만 이리저리 생각해 봐도 나에게는 청계천변의 노란 채송화와 같은 강렬한 이미지가 없다. 아마도 경험의 진폭과 깊이를 거론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노란 채송화처럼 지진(地震)과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되면 아무리 거친 세상 풍파가 몰아닥친다고 하더라도 쉽게 포기하거나 좌절하는 일은 없으리라. 나는 천둥과도 같은, 지진과도 같은 그런 전율의 경험을 부러워하며, 내 저장고 안에 조그마한 울림이나마 남아있는 것이 있는지 기억을 더듬거린다. 무더운 여름 날씨 덕분에 우선 한 가지 이미지가 떠오른다. 바로 우물이다.

    어릴 적에 내가 살던 집에는 꽤 넓은 텃밭이 딸려 있었고, 그 옆에 우물이 있었다. 우물이 깊어서 어른들은 늘 우물 근처에서 장난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으며, 가끔 어디에선가 누가 우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우물가가 조용해졌을 때, 혼자 우물 속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저 밑에 검은 물이 흔들리는 듯 아닌 듯 아득하게 자리하였으며, 웅웅대는 소리가 저절로 나는 것 같았다. 우물 안을 보느라 테두리를 잡은 양손에는 물기를 머금은 이끼의 서늘함이 느껴졌다. 바닥을 알 수 없는 검청색의 물, 증폭되어 울리는 소리, 서늘한 그늘의 촉감은 서로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빚어냈다. 한밤중에는 결코 혼자 우물에 갈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과 함께, 목마르지 않아도 가게 만드는 뭔가가 거기에 있었다. 그러다가 한참 후, 여행 중에 들린 강원도 산속의 절에서 그곳 우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우물에 용이 살고 있으며, 물길을 따라 용이 아주 멀리 떨어진 바다까지 왕래한다는 이야기. 여름인데도 산속에서 비를 맞고 헤매면서 추워서 덜덜 떨던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물길 없이 용이 살 수 없듯이 우리도 그런 우물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장마가 끝난 여름철을 제 세상으로 만드는 것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매미와 잠자리다. 높이 자란 포플러 나무가 집 근처에 많아서, 매미는 울음소리만 요란할 뿐, 잡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동네 아이들 중에는 고수가 있게 마련이어서 그들이 잡은 매미를 보여준 적이 있다. 그때 받은 매미의 인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타협을 모르는 고집쟁이 같다는 것이다. 외계에서 날아온 것 같은 외모와 그칠 줄 모르고 내지르는 소리, 그리고 더위가 수그러지면서 일제히 사라지는 모습이 결코 만만한 생명체가 아님을 보여준다. 하지만 좀 더 길게 여름철 풍경을 책임지는 것은 잠자리라고 할 수 있다. 잠자리가 주는 친근함은 그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다. 쌀잠자리, 보리잠자리, 밀잠자리, 된장잠자리, 고추잠자리, 실잠자리 등 온통 우리에게 익숙한 것에서 온 이름이다. 비행기 날개를 닮아 낯설지도 않으며, 바지랑대에 내려앉아 쉬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잠자리와는 격을 달리하는 잠자리가 있으니, 우리는 그를 “야모”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것은 보통 잠자리의 두 배보다 더 크고, 배와 허리에는 하늘색과 초록색으로 빛나며, 아무리 쫓아다녀도 내려앉아 쉬는 법이 없다. 그래서 그것을 잡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고수의 방법은 암컷을 한 마리 잡아 미끼로 하여 수컷을 잡는 것인데, 먼저 어떻게 암컷을 잡는지 알기 힘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왕잠자리가 바로 “야모”의 이름이라는데, 나에게 그것은 언제나 별도의 영역에 살고 있는 잠자리였고, 함부로 해서는 안될 것 같은 생명체였다. 청녹색의 신비한 빛깔을 발하며 스스로 절제와 위엄을 지키고 있으므로 그에 맞는 대접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어느 날, 전등을 끄고 자려는 참에 마루에 날아든 “야모”를 기억한다. 그의 깜짝 방문에 놀란 나는 그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그를 따라다니며 작은 소동을 벌였다. 곧 그는 귀찮다는 듯, 몇 차례 마루 주변을 돌며 날렵한 비행을 보여주더니 휙 하니 다시 사라져 버렸다. 지금도 그날 일이 생생한 것을 보면 틈틈이 그 기억을 꺼내 녹슬지 않게 했음이 분명하다. 그만큼 나도 모르게 “야모”에게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여름철이 문제다. 그는 노란 채송화의 강렬한 경험을 했고, 나는 채송화와 비슷한 것을 찾으려고 하다가 그만 우물과 왕잠자리에 닿게 되었다. 겨울철이라면 다른 색의 경험이 나타났을 것이다. 여름에는 밖으로 벗어나려고 하고, 겨울에는 안으로 파고 들어가려는 경향이 있다. 눈 오는 날, 창밖을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거나 기억의 발자국을 따라간다면 틀림없이 다른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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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진홍, <거룩함과 아름다움>, <<종교문화비평>> 통권 40호, 종교문화비평학회, 2021, 292-293쪽.

 

 

 

 

 

 

 

 

 


장석만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한국근대종교란 무엇인가?》의 책과 <두 가지 몸의 늙음: 한국 근대 노년 관점의 변화>, <식민지 조선에서 여자가 운다>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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