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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미즘과 현대 세계: 다시 상상하는 세계의 생명성』 책 출간에 부쳐
news letter No.776 2023/5/2
1.
한반도 남쪽의 작은 시골마을로 이주한 지 햇수로 8년차이다. 시골에 오기 전에는 대형마트와 영화관, 도서관과 병원, 지하철역에 걸어서 갈 수 있는 도심 한복판에서 살았다. 도시에서 살 때 내 주위에는 온통 인간들, 그리고 인간이 만든 사물들이 가득했다. ‘인간(적인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내가 의식하는 세계였다. 물론 도시에서 살 때도 주위에 가로수를 비롯한 식물이 있었고 새나 길고양이를 비롯한 동물이 있었지만, 유심히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거나 혹은 소통하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나 외에도 많은 도시인들에게 자신이 키우는 반려식물이나 반려동물을 제외하고는,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식물은 그저 인간 세계를 이루는 배경에 불과하고, 움직이는 비인간 동물은 그 세계에서 이따금 눈에 띄는 단역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처럼 인간만이 이 세계라는 무대를 활보하는 배우로 상상하고 나머지는 무대장치나 일종의 배경, 혹은 소품으로 여기는 것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아니 현대 세계의 주류적 세계관이 된 것 같다. 이 세계에서 유의미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는 오로지 인간이며, 무대는 인간의 독백으로 채워진다. 나 역시 인간(적인 것)들로만 이루어진 세계만을 감지하고 또 무의식적으로 상상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런데 시골로 이주하고 난 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도심에서 살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듣지 못했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상이 새롭게 열리고 있었다.
2.
이주 초기에 닭을 키웠던 적이 있다. 시골에서 알게 된 어른들의 도움으로 오골계와 청계가 햇빛을 보고 흙을 밟으며 자유롭게 지낼 수 있는 닭장을 만들어서 닭을 키웠다. 닭들은 보살피는 인간들의 어설픈 손길에도 불구하고 아주 잘 자랐고, 마침내 알을 품기 시작했다.
닭이 얼마나 치열하게 알을 품는지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정말 놀랐다.
생각 없는 사람을 ‘닭대가리’라고들 하는데, 그 말은 아주 잘못된 것임을 그때 깨달았다. 닭들은 잠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알을 품기 위해 물도 마시지 않고 모이도 먹지 않고서 밤낮으로 자기 자리를 지켰다. (그래서 암탉 앞으로 모이그릇과 물그릇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나는 암탉들에게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치열하게 전력으로 투신하는 존재의 눈빛을 보았다.
그런데 또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모든 암탉이 그렇게 치열하게 알을 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암탉은 정말 치열하게 알을 품는 한편, 알을 낳아서 슬쩍 밀어두고서 놀러 다니기만 하는 암탉도 있다. 수탉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어떤 수탉은 낯선 외부인이 오면 앞으로 나서서 가족을 보호하는데, 우리 집 수탉은 낯선 사람이 오면 암탉 뒤에 숨기 바빴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닭들은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마치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 사람처럼.
닭뿐만이 아니었다. 마당에 종종 찾아오던 고양이들, 이런 저런 사연으로 우리 집에서 살게 된 거대견 네 마리, 심지어 추운 날에는 천장 위에 숨어들던 쥐들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개체들은 저마다의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새들, 곤충들, 뱀, 지렁이, 개구리 등 수많은 존재들을 인식하게 되면서, 세상이 조금씩 더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3 .
더욱 놀라웠던 건 시골에서 살면서 비로소 식물의 세계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면서부터다. 도시에서 살 때는 그저 무심히 지나치던 풍경에 불과했던 식물의 생명성을 시골에서는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무화과는 가지를 뚝 잘라내어 땅에 꽂아도 빠르게 자라나 열매를 맺었고, 도시에서 맛있게 먹었던 복숭아는 씨앗을 심었더니 마당에서 큰 나무로 자라서 해마다 백 개 이상의 맛있는 복숭아를 돌려주었다. 포도덩굴의 덩굴손이 빨래줄을 감아 나가는 속도, 그리고 줄을 꽉 잡은 힘은 나를 놀라게 했다.
시골에서 살면서, 식물이 생존과 번식을 위해 빛, 중력, 접촉, 소리, 화학적 자극을 포함한 일련의 환경 요인들을 능동적으로 인식하고 반응한다는 것을 조금씩 실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식물이 주변 환경에서 수집한 감각 정보를 사용해서 다른 유기체들과 끊임없이 소통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특히 우리집 마당에서 일어난 호두나무와 광나무의 성장 경쟁은 식물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 그리고 생존과 번식을 위한 식물의 전략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4.
『애니미즘과 현대 세계: 다시 상상하는 세계의 생명성』의 구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시골에 와서 생명세계가 얼마나 역동적인지, 얼마나 다채롭고 풍성한지를 경험하면서, 나는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시골에서 만나게 된, 생명세계에 기대어 삶을 일구어 나가는 농부와 어부 들은 비인간 존재들의 생명성을 예민하게 인식하는 일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고, 나는 예부터 전해오는 공존과 공생을 위한 삶의 지혜를 조금씩 전해듣게 되었다.
5.
시골생활 초창기에 나는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의 『원시문화』를 번역하고 있었다. 타일러는 그 책에서 동서고금의 풍부한 사례들을 통해 (땅에 밀접하게 깃들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동물의 영혼, 식물의 영혼, 물체의 영혼에 대한 믿음을 ‘애니미즘’이라는 용어로 지칭하면서 인류 문화에 관한 거대한 이론을 전개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1871년 타일러의 책에서 나온 사례 중에는 150여 년이 지난 후 한반도 남쪽의 시골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와 겹쳐지는 내용들이 적잖게 있었다. 가령 우리 집에 놀러 오신 시골 토박이 어르신은 이 지역에서는 집안에 누가 죽었을 때 부고 종이를 벌통에도 한 장 끼워놓는 관습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렇게 꿀벌에게 소식을 알리면, 꿀벌 몸에 (마치 죽은 이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처럼) 노란 띠가 생겨서 한동안 그렇게 띠를 두르고 날아다녔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시문화』에도 그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 영국에서는 집안의 남자주인이나 여자주인이 죽었을 때 지키는 ‘벌들에게 말하기’란 애처로운 관습이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관념은 독일에서 더욱 완전하게 나타난다. 곧 슬픈 소식을 정원의 모든 벌통과 마구간의 모든 짐승에게 전해야 할 뿐 아니라, 모든 옥수수자루를 건드리고 집안의 모든 것을 흔들어서 주인이 세상을 떠난 것을 알게 해야 한다." 유럽에서 벌을 치던 농부들 사이에서도 한국 남도에서 벌을 치던 농부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관습이 있었다는 게 너무나 흥미로웠다.
그러한 관습들,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그저 어리석고 고리타분한 관습과 이야기로 여기지 않고 다르게 접근할 수는 없을까?
6.
그러한 물음을 가지고, 나는 이 책에서 ‘애니미즘’ 개념을 다양한 방식으로 새롭게 사유함으로써 시골에서의 나의 경험과 그간의 나의 공부를 하나로 엮어보려고 시도했다.
애니미즘이란 용어는 지금껏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주체에 의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 왔지만, 그 모든 용법에서 핵심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동일성과 차이에 대한 물음이다. 이러한 물음은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의 차이에 관한 물음에서 시작해서 인간이 세상의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상상해왔는가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지며 나아가 인간이 세계와 맺는 관계의 물음으로 확장된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책에서는 애니미즘 논의를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서 각 갈래의 핵심이 되는 물음을 제시하고, 그러한 물음을 둘러싸고 전개된 애니미즘 논의의 맥락과 중심 내용을 풍부한 사례를 통해 살펴보려 했다.
제1부를 관통하는 물음은 “무엇이 우리와 그들을 다르게 만드는가?”이다. 이는 타일러의 ‘야만인들’이 품었음직한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에 대한 물음 뿐 아니라 근대적 자아가 상상한 타자성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제2부를 관통하는 물음은 오히려 “무엇이 우리와 그들을 하나로 묶는가?”이다. 근대적 시각에서 규정된 타자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바탕으로, 인간이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와 맺는 관계를 특히 비인간 동물 그리고 식물과 맺는 관계를 중심으로 성찰하는 것이 2부의 핵심을 이룬다. 제3부에서는 현대 하이테크놀로지 시대를 배경으로 인간과 물질,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살피고, 생명의 연속성과 비연속성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나는 무엇보다도 인간과 ‘자연’의 좀 더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인간과 세계의 분리가 아니라 연결을 상상하는 애니미즘적 세계관과 삶의 방식에 주목하고 이를 재발견하려고 시도했다. 얼마나 그러한 목적에 다가갔는지는 독자가 판단할 몫이다.
7.
인간들만이 무대 위 주인공이고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을 인간을 위한 소품이나 배경으로만 여길 때, 세상은 단조롭게 경험된다. 그러나 비인간 존재들의 생기와 활력을 민감하게 인식하기 시작할 때,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다채롭고 풍부한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지기 시작한다. 이 책이 세계의 생명성을 다시 상상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이 글은 『애니미즘과 현대 세계: 다시 상상하는 세계의 생명성』(눌민, 2023)의 프롤로그와 서문의 일부를 발췌해서 다듬은 것이다.
유기쁨_
서울대학교 강사
저서로 《생태학적 시선으로 만나는 종교》, 《아픔 넘어: 고통의 인문학》(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원시문화》,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문화로 본 종교학》 등이 있다. 최근 논문으로 〈‘병든지구’와 성스러운 생태학의 귀환〉, 〈인간적인 것 너머의 종교학, 그 가능성의 모색: 종교학의 ‘생태학적 전회’를 상상하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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