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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을 넘는 연구자: 기후위기 시대의 학문과 공부에 대한 생각

 

 

news letter No.824 2024/4/2

 

 

 

연구는 사실 대화이며, 대화는 얼마나 많은 목소리를 가진 존재들이 참여하고 있느냐에 따라 항상 다양한 방향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1)

 

 

#1

     지난 주말에 강화도의 심도학사에서 12일에 걸쳐 진행된 시민강좌에 참여했다. 거기서 나는 생명 세계를 살아가는 감각이라는 주제로 두 차례 강의했고, 그 밖에도 주최 측이 마련한 장미 명상, 콩세알 농장에서 두부 만들기 등 소박하면서도 진지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부터 70대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에 속한 여남은 명의 사람들이 깊이 있는 경험을 함께 만들어 간 시간이었다.

     이날의 강의에서 나는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잊/잃어버리고 있는 생명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감각을 건드리고 다시 일깨워 보고 싶었다. 첫 강의에서는 애니미즘의 렌즈를 빌려서 인간이 세계 내 비인간 존재들과 맺어온 관계를 생각해 보았고, 두 번째 시간에는 우리의 구체적 일상 속에서 인간과 다양한 비인간 행위자들의 얽힘을 발견하고 성찰하는 가운데, ‘함께 하는 미래를 위한 대안적 관계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도록 초대했다.

     물론 피피티와 강의안을 준비해서 강의를 진행했지만, 이번에 나는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가르치기보다는 해당 주제에 관해 참가자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데 좀 더 주안점을 두었다. 참가자들의 진지하고 적극적인 참여 덕분에, 짧은 일정 중에서도 여러 사람의 자취가 얽히는 크고 작은 사건이 다채롭게 펼쳐졌다.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 경험과 자기 느낌과 자기 생각을 자기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수많은 자취가 얽히고 연결되는 그 순간이, 그 순간의 별것 아닌 듯한 그 경험이 나는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에 나의 강의는 저마다의 잊힌 경험과 기억을 건드리고 깨워내어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만드는, 얽힘과 엮임이 일어날 수 있는 장을 조성하기 위한 빌드-업 장치이기도 하다.

 

 

#2

     근래에 나는 노르웨이의 철학자 네스(Arne Naess)가 제안한 생태지혜의 중요성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해 보고 있다. 네스는 1973년에 “The Shallow and the Deep, Long-Range Ecology Movement: A Summary”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표피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기존의 환경운동을 비판하고, 좀 더 심층적(deep)이고 장기적인 생태학(운동)을 제안했다. 산발적인 환경운동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좀 더 근본적이고 깊은변화를 도모하는 생태학(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후 심층생태학(Deep Ecology)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네스가 볼 때, 우리가 직면한 생태위기 상황은 더 심층적인 수준에서의 변화를 요청한다. 그래서 변화를 꾀하는 우리의 운동은 철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때 네스가 언급한 철학은 단지 학문적인 논의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생태학에서 생태철학으로, 나아가 생태지혜(ecosophy)로 이어지는 흐름을 굉장히 중요하게 이야기한다. 여기서 생태학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과학적인 접근법을 가리키며, 생태철학이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 논하는 개념적 지식으로서의 철학을 뜻한다. 네스는 생태학이 제공하는 지구상 생명의 삶의 조건 등에 대한 생태학적 사실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생태철학이 요청된다고 여겼다.

     그런데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은, 위기 상황에 놓인 우리에게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생태학은 생물들이 서로와 맺는 관계 그리고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삶의 조건에 대해서 굉장히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지만 행동을 위한 원칙을 제공할 수는 없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논하는 개념적 지식으로서의 생태철학은 학문적으로 다룰 만한 연구 분야이자 진리에 대한 접근법으로서 유의미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진정한 변화를 도모할 수 없다. 네스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심층적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자기 자신의 결정을 인도하는 사적인 가치 코드 및 세계관과 연관된 생태지혜를 계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생태지혜(ecosophy)라는 말은 지구상 생명의 토대인 생태권(ecosphere)과 통찰 혹은 지혜를 뜻하는 소피아(sophia)를 결합해서 만든 단어인데, 네스는 이를 지구상 생명의 토대와 관련된 지혜라고 말한다. 네스는 학문적으로 생태철학을 연구할 수 있지만, 실제적인 상황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생태지혜를 계발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이때 생태지혜는 추상적인 과학이나 엄밀하게 논리적인 논의라기보다는 경험에서 생겨나는 친밀한 지식과 이해이며, 직접적인 행동과도 연결된다.

     그렇게 보면, 생명세계를 살아가는 것에 관한 잃어버린/잊힌 자기 경험과 느낌을 새삼스럽게 다시 꺼내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 자체가 저마다의 생태지혜를 일깨우고 나누는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또 연구자의 자리에 대한 나의 고민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3

     지난 가을 연구소에서는 이른바 기후위기의 의미를 인문학자들이 함께 논하는 워크숍이 비대면 화상회의로 개최되었다. 당시 장석만 선생님은 기후위기의 시대는 기존의 것들이 흔들리고 뒤집히는 근본적인 전환의 시기이지만 현재의 학문은 구태에 머물러 있음을 비판적으로 고찰하였다. 가령 종교학은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기원전 5세기 축의 시대라는 사상적 전환기에 머물러 있다는 말씀이 기억난다.

     그때 나의 발표 제목은 담을 넘는 연구자였다. 사실 이 제목은 대학 강의실에서 한 학생이 작성한 쪽글 과제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 학생은 대학교 주위로 둘러쳐진 울타리에 난 구멍으로 기어나가서 다른 세상’(그러니까 산과 계곡)을 만났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다음에는 구멍으로 기어나가는 게 아니라 담을 넘어가고 싶다고 중의적 의미에서 적었다.

     인류세 시대의 학문/공부/연구/연구자의 자리에 대해서 줄곧 생각한다. 인류세 시대에 다양한 학문적 논의들이 가리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변화의 필요성이고, 우리가 이른바 진리’(를 향해 가는 길에서)의 권위를 구축하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담을 넘는다는 말은 오늘날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자세 같은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한 인터뷰에서 쥐와 고양이, 셜록 홈즈와 모리어티는 모두 연구자라고 할 수 있으며, “사실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에 관해 연구하고있다고 말했다.2) 연구에 대한, 나아가 연구자의 권위에 대한 통념을 뒤집는 말이다.

     위기의 시대에 비인간의 귀환이라는 말이 다양한 분야에서 회자된다. 연구 대상의 귀환이라는 말로 치환도 가능할 것 같다. 가상의 연구 테이블이라는 것이 있다면, 연구자가 연구 대상을 대상화하고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서 머무르지 않고, 함께 가상의 테이블에 앉아서 위기의 시대에 함께 살아가는 길을 함께 연구하는 것이다. 아니, 실은 함께 살아가면서 함께 연구한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하겠다.

     잉골드는 모두가 연구자라고 했다. 저마다 자기 시점을 가지고 자기 삶을 연구한다. 에두아르도 콘은 이를 생각한다고 표현했다. 연구를 업으로 삼는 이의 역할은 서로 다른 연구를 번역하고 연결하고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 가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늘도 나는 담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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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효민 외, 팀 잉골드(Tim Ingold)와의 인터뷰, 과학기술학연구, 222, 2022, 206.

2) 위의 글, 206.

 

 

 

 

 

유기쁨_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저서로 『애니미즘과 현대 세계: 다시 상상하는 세계의 생명성』, 『생태학적 시선으로 만나는 종교』 등이 있고, 역서로 『대지에 입맞춤을: 당신이 먹는 음식이 기후변화를 역전시키고 당신의 몸을 치유하며 궁극적으로 우리 세계를 구원할 수 있을까』,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문화로 본 종교학』, 『원시문화』 등이 있으며, 최근 논문으로 「인간적인 것 너머의 종교학, 그 가능성의 모색: 종교학의 ‘생태학적 전회’를 상상하며」, 「‘병든 지구’와 성스러운 생태학의 귀환: 생태와 영성의 현실적 결합에서 나타나는 종교문화 현상의 비판적 고찰」, 「발 플럼우드의 철학적 애니미즘 연구: 장소에 기반한 유물론적 영성 개념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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