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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825호-12년을 벼르던 연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4. 4. 9. 17:17

12년을 벼르던 연구

 

 news letter No.825 2024/4/9

 

 

 

서울대벤처타운역에 하차해서 미림여고 맞은편 삼성동 시장 근처 골목으로 간다. 한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다란 골목에 발을 들여놓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하얀색과 빨간색 깃발이 꽂혀 있고, ()자들 옆에 별상선녀, 약사암, 산신도사 간판을 건 점집들이 빼곡하게 몰려 있다. 비슷한 풍경은 봉천역 일대에도 펼쳐진다. 높은 빌딩이 드리우는 그림자 아래 늘어선 좁은 골목에는 촘촘하게 점집들이 몰려 있다.

 

2011년부터 신림동과 봉천동에 살기 시작하면서 점집 밀집 지역이 눈에 들어왔다. 이 지역은 점보는 장소면서 무속인들의 실거주지로, 신림동과 봉천동은 현재 무속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되었다. 서울에서 이 동네만큼 좁은 구역에 점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도 드물 것 같다. 관악구민이기도 하지만 종교학자로서의 직업병이 도졌다. 무속인의 삶을 중심으로 이 지역의 역사를 써보자. 여기에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무속인이 모여 살기 시작했나, 이들의 삶은 어떤가, 이 지역 무업의 특징이 있을까, 동네 사람들이 점 보러 오나? 이러저러한 궁금증을 가득 안고서 동네 점집들을 지나갈 때마다 들어가서 물어보고 싶었다. 2011년부터 몇 번 시도는 했는데 혼자서 연구하러 왔다고 하면 경계하는 태세로 점집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마음만 가득하고 차일피일 지내다가 12년이 흘렀다. 그사이 삼성동 시장 윗동네는 신림재개발1구역이 되어서 불도저로 밀렸다. 아차, 늦었구나. 그러나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했던가? 재개발로 소멸 직전에 임박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 기록을 남겨 두어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생겼다.

 

다행히 작년부터 수업을 통해 만난, 마음 맞는 몇몇 학생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현지조사를 시작했다. 함께 우르르 몰려다니면, 그리고 점집이 상대적으로 한가한 시기의 오후에 다니면, 또 학생들의 모습이 비치면 무속인들이 인터뷰에 응할 확률이 있다. 무속인과의 면담은 성공보다 실패하는 날이 더 많다. 점집을 똑똑두드리고 인터뷰 의사를 물어보고 거절당하는 일이 반복된다. 점집 밖에 설치된 CCTV로 우리 일행을 발견하고 의심스러운 사람들인가?” 문밖으로 나왔다가 인터뷰 요청에 응한 무속인들도 있다. 저마다의 무속인이 겪은 이야기는 종교연구가 아니더라도 흥미진진한 인생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방학 중에는 시간 날 때마다, 학기 중에는 보통 금요일과 토요일에 봉천동과 신림동 재개발 지역 점집들을 어슬렁거린다. 운이 좋으면 하루에 한두 군데 점집에 앉아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주중에는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고 수집한 내용을 들여다보면서 어떤 쪽으로 연구가 향할 것인지 그 방향을 가늠한다. 현재 봉천동과 신림동 점집 밀집 구역에서 간판을 직접 확인하고 맵핑한 점집이 110군데다. 왜 이 지역에 무속인들이 밀집하게 되었나? 우선 집세가 싸고, 무허가주택이거나 재개발을 앞둔 곳이다 보니 주인 있는 집도 다른 동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그다지 까다롭게 굴지 않는 것 같다. 무당집은 굿소리와 꽹과리 소리가 나고, 향과 초를 피우기에 다른 지역에서는 집주인들이 싫어한다고 말한다.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이 지역에 오래 산 주민들, 봉천동과 삼성동 시장 상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삼성동 시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상인은 전생을 알고 있는 사람의 집이라는 간판을 달고 신발을 팔고 있다. 독특하달까, 기이하달까, 경제인과 신의 세계에 걸쳐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몇 시간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인생 이야기 듣는 재미가 있다. 반면 지역 주민들로부터는 이 동네에 대해서 그다지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사실 못사는 동네라서 내세울 게 없다는 것이 만나본 주민들의 이야기다. 오래 산 주민들은 이 지역으로 이주한 상황을 기억한다. 서울역 앞, 청계천 근처, 양동이 70년대 개발되면서 판자촌과 쪽방촌 철거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서 시유지에 무허가주택들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서 들었다. 1960년대 산업화 시기 시골에서 도시로 삶의 거처를 옮긴 대규모 인구 이동에 관한 거시사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철거와 재개발로 점철된 서울의 역사가 이곳 주민들과 무속인들이 겪은 이주의 삶 속에 그대로 드러난다. 정부는 서울의 판자촌 거주민을 신림동과 같은 도시 외곽으로 이주시켰지만 불안정한 주거환경은 지금까지 계속된다. 이곳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으로, 도시가스 없이 전기장판과 연탄으로 난방을 하는 집들이 꽤 있다. 골목 곳곳에 설치된 공공화장실은 개별 화장실의 부재를 말한다. 그런데 별 볼 일 없다는 이 지역에서 만난 사람들의 인생사가 내게는 소위 잘사는 동네보다 훨씬 흥미롭다. 인간미와 애환이 넘치는 서사를 품고 있는 동네라고 자세하게 들여다보니 같은 지역구민으로서 일종의 애향심 비슷한 것이 생긴다. 내가 오래 살고 있고, 동네 사람들과 엮어내는 이야기가 담긴 장소가 고향 아닌가.

 

재개발 조합장의 말에 따르면 미아리고개가 뉴타운으로 재개발되면서 밀려난 무속인들이 이곳으로 오면서 10년 전부터 점집이 급증했다고 한다. 그런데 언젠가 여기까지 재개발되면 원주민과 이주민들은 또 어디로 옮겨가야 하나? 경제적 어려움과 더불어 고령에 접어든 무속인들의 경우 종교적 영험함이 떨어져 활발한 무업을 할 수 없는 흐름이 포착된다. 점집 간판은 걸려있고 신당은 갖추어졌지만, 점보기나 굿을 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기도만 하는 무속인들이 있다.

 

12년을 벼른 연구를 하는 요즘이다. 자료가 어느 정도 모였다는 판단이 설 때 학생들과 함께 무속인들의 생애사와 지역민들의 구술사를 중심으로 서울시 관악구 지역사를 쓸 계획이다. 혼자 연구하고 글 쓰는 일에 익숙하다가 젊은 친구들과 분업해서 글을 쓸 생각에 정신이 핑핑 돌기도, 기대되기도 한다. 원하는 성과가 나온다면 내 인생에서 종교학자로서 큰 전환점을 가져오는 연구가 될 것으로 나름 생각한다. 문헌 위주 연구에서 현장 연구로, 보편 이론에서 지역사로 한번 중심을 옮겨 보기로 한 것이다. 물론 전자와 후자는 서로 얽혀있고 병행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장 연구와 함께 대한민국 도시 발전사, 관악구 지역 자료, 사회학의 빈곤 연구 같은 문헌들을 꽤 열심히 읽어야 할 것이고, 관악구 지역사를 대한민국 현대사의 어떤 큰 흐름에서 엮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백 개가 넘는 점집 얘기를 다 들어보지 않는 이상 이곳 무속의 특성을 일반화하기는 섣부른 작업일 것이다. 기존의 종교학 이론을 적용하거나 보편적 이론을 만들 생각은 아직 없고 일단 특수에 충실하자 주의다. 현재로서는 인터뷰에 응하는 점집들을 중심으로 무속인들, 그리고 동네 역사를 잘 아는 주민들을 시간이 허락하는 한 많이 만나서 구술 자료를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컴퓨터의 하얀 모니터 앞에서 커서를 움직이며 쉽게 이해되지 않는, 외국어로 적힌 종교학 이론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이해하려고 하고, 머리채를 움켜잡고 무엇이라도 써봐야겠다고 용을 쓰던 자세에서 조금 벗어나게 된 것 같기는 하다. 내가 애써서 뭔가를 만들려고 하지 않고, 세상에 있는 이야기가 나를 쓰게 하리라.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한 연유에는, 이미 존재하는 이론을 힘겹게 이해하려고 애쓰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에서 좀 거리를 두고 연구의 활로를 새롭게 트고 싶어서였을까? 종교학 이론만 공부하면서 인생을 보내기가 좀 심심할 수도 있다는 예감에, 모종의 전환을 모색해야 할 시기임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행동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점집 구역을 돌아다니며 이 지역을 대하는 내 감성이 달라지고 있다. 음산했던 골목, 그래서 혼자서 서성이다가 어둠이 깔리면 발걸음을 돌리던 지역이 이제는 꽤 정겹게 느껴진다. 점점 더 많은 무속인의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더 이상 빈집이나 무허가주택이 아니라 아는 무당이 있는 동네가 되어 간다.

 

 

 

 

최정화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최근 저서로 《방황하는 종교성과 국민문화: 근대화하는 일본・독일 사회의 신화와 종교》(일본어, 공저)와 《세속주의를 묻는다: 종교학적 읽기》(엮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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