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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과 불교의 친연성에 대한 가정 하나
news letter No.867 2025/1/28
조선왕조의 공식적인 통치 이념은 성리학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여성들은 많은 경우 불교를 신앙하며 다양한 형태의 불사를 후원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어린 임금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에 나선 대비들이 드러내놓고 친불교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여성들의 불교 신행에 대해서는 대체로 가정의 화합과 자손의 번영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통치의 최종 책임자인 임금도 스스로 호불 군주임을 내세우며 적극적인 친불교 정책을 펴는 사례가 없지 않았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대비전의 뜻이므로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소극적인 태도로 왕실 여성들의 친불교 성향을 성토하는 신료들의 공격을 피해 가곤 했다. (전자의 대표적인 사례로 세조가,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성종과 명종이 떠오른다.)
이 대목에서 세조비 정희왕후(1418~1483, 성종의 조모, 대비로서의 존호는 자성, 이후 정희왕후로 통일)와 중종비 문정왕후(1501~1565, 명종의 모후, 대비로서의 존호는 성렬, 이후 문정왕후로 통일)를 주목한다. 이들은 남편의 사후 대비의 신분으로 어린 임금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며, 훈구대신 또는 신진 사림에 맞서 왕권을 지켜내고 그 과정에서 불교를 후원 또는 중흥했던 대표적인 왕실 여성이다.
정희왕후는 성종 초 수렴청정 기간 선왕들의 외손으로서 서용되지 못한 자를 아뢰도록 하거나 본인의 친정 형제에게 특혜를 베푸는 등 척족 세력을 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세조의 왕위 찬탈 과정을 함께 했던 훈구대신 그룹을 견제하고자 했던 의도로 파악되는데, 당연히 훈구대신 세력의 반발과 견제를 야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희왕후가 활용했던 또 하나의 권력 행사의 근간이 바로 불교였다.
성종 1년(1470) 내불당의 이건, 성종 2년(1471) 낙산사 옛길의 폐쇄, 성종 6년(1475) 회암사 중수 등은 모두 정희왕후의 의지에 따라 행해진 것이었다. 정희왕후는 내불당의 이건 과정에서 대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업을 추진하였고, 낙산사 옛길의 폐쇄에 대해서도 “절에 가는 자들은 모름지기 새 길을 거쳐야 한다. 옛길은 절에 가는 자들이 밥을 지어 먹다가 불이 절에 번질까 두렵다.”라고 하며 이 조치를 선창하였다. 회암사의 중수 역시 의숙공주의 발원에 정희왕후가 힘을 보탠 것이었다.
정희왕후의 불사는 성종 7년(1476) 수렴청정을 그만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성종 11년(1480) 상원사에 산산(蒜山)의 제언(堤堰)을 돌려주게 하고, 수춘군(壽春君)의 부인을 정업원의 주지로 삼은 것 등이 대표적이다. 대비의 불사에 대해 조야의 반발이 잇따랐으나, 그때마다 성종은 정희왕후의 숭불을 옹호하며 논란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정희왕후가 추진하였던 여러 불사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세조의 능침사찰인 봉선사의 건립(중창)이었다. 이것은 예종 대에 추진된 불사였으므로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규모가 남다르고 정희왕후와 왕실 전체에 남달리 중요한 사업이었을 뿐 아니라, 이후 여타 대비들의 수렴청정기 사찰 불사의 선례가 된다는 점에서 살펴볼 만하다.
1469년 6월에 불사를 시작하여 7월에 낙성하고 4개월 만인 9월에 공사를 마친 봉선사는 89칸 규모에 대종을 조성하고 기물과 각종 의식 용구를 구비하여 그 어떤 사찰도 비길 바가 아니었다고 전한다. 불사의 진행 과정에서 정희왕후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승려 학열(學悅)과 학조(學祖)가 이미 완성된 승당을 헐고 다시 짓게 하였을 만큼 정성을 들였으며, 절이 완성되자 국가에서는 토지와 노비, 돈을 항상 부족함 없이 갖추게 하여 영원토록 절과 승려를 공양토록 하였다. 불사를 마친 그해 9월 7일에는 세조의 천도재를 이곳에서 성대하게 열었다.
봉선사의 창건과 유지는 왕실의 재정 담당 기관인 내수사의 비용으로 충당되는 것이었다. 주목할 사실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내수사의 비용이 왕실 사찰 불사에 대규모로 투입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덕종의 경릉과 예종의 창릉을 위한 능침사찰인 정인사, 세조의 광릉을 위한 봉선사, 성종의 선릉과 중종의 정릉을 위한 봉은사는 모두 내수사의 비용으로 창건된 절들이었다. 기존의 연구는 이것이 왕실의 사사로운 불사 설행을 위한 비용 염출임을 강조하며, 이 시설들이 국가기구가 아니라 왕실의 사적 기도처로 전환되었음을 방증한다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조금 다른 상상을 해볼 수는 없을까?
내수사 비용에 의한 능침사찰 건립을 재용의 소비라기보다 왕실 재산의 보관 및 축적의 수단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 말이다. 물론 사찰의 건립에 일차적으로 비용이 든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후 능침사찰들에 주어지는 일반적인 특혜, 즉 수조지와 노비의 이속, 그리고 경우에 따라 별도로 부가되는 특혜, 즉 주변의 산림, 저수지, 어렵에 대한 이용권 등을 고려할 때, 능침사찰의 존재는 오히려 왕실의 재산을 보관⸱유지하는 기능을 가지며, 더러는 국가의 공공재가 신료들에게 분급될 수 있는 가능성을 미연에 차단하고 왕실의 소유로 귀속될 수 있도록 할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본다. 이 같은 추정이 설득력을 얻는다면, 왕실 여성들에 의해 내탕고가 투입되어 건립 또는 중건된 왕실 원찰의 존재를 왕실의 재정 수호적 기능 속에서 조망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며, 또 그 같은 불사를 통해서 왕실 혹인 개인에게 귀속된 사적 재산의 관리 및 식화(殖貨)로써 왕실의 여성들이 정치・경제적 자원으로 삼았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 같은 관례의 모범이 정희왕후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내수사의 비용을 사용한 왕실 사찰의 건립으로 경제력의 유지⸱확대를 도모했던 정희왕후는 당대 불교계의 실력자들을 후원하고 친분을 다짐으로써, 동시에 그들로부터 인정되는 권위와 명망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세조는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권위의 취득을 위해 잦은 상서(祥瑞)와 이적(異蹟)을 대내외에 홍보하였다. 그리고 이는 효령대군과 같은 왕실 어른들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같은 접근이 용이하지 않던 정희왕후에게는 불교계 실력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종교적 권위를 획득하는 것이 또 다른 출구가 되지 않았을까? 불교는 남성 권력과 한편에 선 성리학에 대항 기제로 활용될 수 있었기에 더욱 적합한 파트너였을 것이다. 세조~성종 대를 대표하던 불교 승단의 실력자는 단연 신미(信眉)와 그의 두 제자인 학열(學悅)과 학조(學祖)였다.
정희왕후는 수렴청정기는 물론 철렴 이후에도 그들에 대해 우대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성종 4년(1473) 청도 복천사를 방문 중인 신미와 학열에게 말을 내어주도록 병조에 지시한다든지, 성종 7년(1476)과 9년(1478) 상원사를 거점으로 학열이 주도한 제언(堤堰) 및 답지(沓地) 개간 사업을 허용해 준 것이 대표적이다. 학열의 제언 축조 및 개간 사업은 국가 법령에 위배되는 것이었고 따라서 신료들의 탄원이 이어졌지만, 정희왕후와 성종은 학열이라는 승단 지도자에 대한 우대와 그의 사업으로 늘어날 경제력의 확대를 고려하여 그 같은 우호적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정희왕후는 왕실 사찰의 건립 및 중수를 통하여 경제력을, 그리고 승단 실력자들에 대한 우대를 통하여 종교적 권위를 획득하고, 이를 토대로 자신의 정치권력을 유지하며 이후 그 권력을 이양받을 후대의 국왕들이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 아닐까?
문정왕후는 정희왕후가 시도했던 방식을 계승하여 불교를 통해 본인의 권력과 왕권의 강화를 더욱 전면적으로 이루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문정왕후가 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 1509~1565)를 중용하며 힘을 모아 불교 중흥을 이루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희왕후가 학열과 학조로 대표되는 종교적 권위에 기대었듯이, 문정왕후 또한 보우를 통하여 같은 효과를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희왕후가 세조의 정치적 동지인 훈구대신 세력에 대항했다면, 문정왕후는 성종~중종대에 정계에 진출하여 왕권을 압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한 신진 사림파에 대항하며, 중종 대에 혁파되었던 각종 불교 제도를 부활하여 자신의 편에 세우고자 하였다.
그런데 문정왕후의 불교정책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내원당(內願堂)의 존재이다. 원당(願堂)이란 개인 또는 일족이 자신의 소원이나 조상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운 사찰이다. 그중에서도 왕실의 기도 사찰로 궁궐 안에 세워진 원당을 내원당이라 불렸는데, 명종 5년(1550)에는 “중앙과 지방의 큰 절로 내원당이라 지칭되지 않는 곳이 없으니 그 수가 많게는 79곳이나 된다.”는 기록이 등장하여 그 개념과 수에서 파격을 보인다.
추정컨대 명종 5년의 ‘전국 내원당 79곳’은 바로 왕실 인사들의 개인 원당들을 아울러 왕실의 내원당으로 간주하는 인식 또는 정책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짐작된다. ‘내(內)’라는 글자를 ‘궁궐 내부’라고 하는 공간적인 의미가 아닌 ‘왕실의 것’이라는 범주 상의 의미로 새기며, 왕실 내원당의 규모를 전국적으로 확장하여 불교와 왕실과의 관계성을 더욱 돈독히 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후 내원당의 숫자는 급격히 증가하여 명종 9년(1554)에는 300~400곳으로 보고되며, 왕실의 번영과 가문 구성원들의 안녕을 비는 여러 불사와 불공이 이루어졌다.
이 내원당의 수호는 내수사에 맡겨졌다. 이는 정희왕후 당시 능침사찰의 경우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명종 대 왕실의 기도처인 내원당에는 왕실 인사나 내외 인척들의 개인 자금이 희사되기도 하였는데, 경우에 따라 내원당의 보시금이 다시 내수사로 유입됨으로써 왕실과 내원당의 밀착이 더욱 공고해졌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편, 이처럼 늘어난 내원당들을 운영하려면 응당 그에 상응한 인력이 필요했을 것이므로, 국가 공인 승려의 양성을 위한 도첩과 승과의 부활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승정을 도맡을 기관 즉 양종도회소의 복설이 요구되었기에, 봉은사와 봉선사가 각각 선종과 교종의 수사찰로 지정되었다. 문정왕후와 보우의 대표적인 불교 중흥 사례로 거론되는 도첩과 승과의 복설, 그리고 봉은사와 봉선사의 중용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상의 정황으로 보건대, 정희왕후와 문정왕후의 불교 후원 내지 불교 중흥의 목적이 단순히 가정의 화합과 자손의 번영을 위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님이 자명하다. 정책의 입안자로서, 경제적 정치적 차원에서 왕권 강화를 강력히 추진했던 것으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조선의 왕실은, 적어도 임금의 든든한 정치적 뒷배가 되어야 했던 대비의 경우, 왕실의 큰어른으로서 경제적 정치적 차원에서 왕권 강화를 강력히 추진하는 방향으로 불교 정책을 입안 시행했던 것이다. 임금 역시 그러한 대비전의 의지와 노력을 인지하였기에, ‘대비전의 뜻이므로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을 내세우며 왕실의 불교 신행을 실질적으로 용인하였던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요컨대 조선왕조는 공식적으로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을지 모르나, 적어도 국왕과 왕실은 비공식적으로나마 불교를 신앙하고 후원하며 성리학을 내세운 신권에 대한 저항 기제로써 활용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조선 왕실과 불교의 친연성을 또 그렇게 상상해 본다.
※ 2025년 1월 26일, 9인의 저자가 공동 저술한 신간 도서 『붓다, 성과 사랑을 말하다 : 불교 섹슈얼리티의 재발견』(2025, 불광출판사)에 대한 북콘서트가 종로구 모처에서 진행되었다. 본고는 이 책의 네 번째에 실린 졸고 「조선 전기 왕실과 사대부 여성들의 삶과 불교」 중 일부를 재서술한 것이다.
민순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박사학위 논문으로 〈조선전기 도첩제도 연구〉가 있고, 논문으로 〈조선 세종 대 승역급첩의 시작과 그 의미〉, 〈한국 불교의례에서 ‘먹임'과 ‘먹음'의 의미-불공(佛供)・승재(僧齋)・시식(施食)의 3종 공양을 중심으로〉, 〈불교의 자비행에 내포된 행복 메커니즘-진화심리학과 공리주의적 윤리학의 관점을 중심으로〉, 〈불교에서 점복이 다루어지는 방식에 대한 일고찰-《점찰경》에 나타나는 방편의 위계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 법화계 불교종단의 역사와 성격〉, 〈여말선초의 승군 개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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