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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제-가설 도식
news letter No.899 2025/9/9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가 끝난 지 꼭 60년이 지났다. 주지하다시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가톨릭교회의 성격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으며 교회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도 큰 주목을 끌었다. 공의회는 4개의 헌장, 9개의 교령, 3개의 선언을 발표하였는데 그중 가장 격렬한 논쟁을 거친 것은 <종교자유에 관한 선언>(1965)이다. 이 선언문은 폐막을 하루 앞둔 1965년 12월 7일 교황 바오로 6세의 서명을 받았다. 최종안이 통과될 때까지 6개의 초안, 3회에 걸친 공개 토론, 120회의 강연, 600개의 서면 제안, 초안에 대한 무수한 비판(구두 혹은 서면)이 있었으며 공의회 참관인들과의 상의 과정도 있었다. 찬성 2,308표, 반대 70표의 압도적 표차로 통과되었으나 마지막까지 보수 강경파의 반대에 직면하였고 그들의 요구를 반영하여 최종 문구를 수정해야 했다.
이처럼 우여곡절을 겪고 탄생한 가톨릭교회의 종교자유선언은 사실은 매우 때늦은 것이었다. 18세기 말 근대국가로 탄생한 미국은 수정헌법 제1조(1791)에서 종교의 자유를 명기했고, 프랑스 역시 혁명 직후 발표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1789)에 종교의 자유를 포함했다. 19세기 말 후발 근대국가로 등장한 일본도 <제국헌법>(1889)에서 ‘신교(信敎)의 자유’라는 이름하에 종교의 자유를 명기했으며, 대한민국 <제헌헌법>(1948)에서도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선언했다. 국민국가들을 회원으로 하는 유엔도 세계인권선언(1948) 제18조에서 양심ㆍ사상ㆍ종교의 자유를 선언하였으며, 개신교와 정교회 소속 교회들을 회원으로 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도 종교자유선언(1948)을 이미 하였다. 그러면 왜 가톨릭교회는 이처럼 뒤늦게 종교자유를 인정해야만 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잠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프랑스 혁명 직후 교황 비오 6세(재위 1775~1799)는 교서 <Quod aliquantum>(1791)을 발표하였는데 종교를 자신의 양심에 따라 선택, 신봉, 표현하는 자유란 가톨릭교회를 말살시키는 것이며 “괴물(monstrum)”이라고 공박하였다. 교황 그레고리 16세(재위 1831~1846)도 양심의 자유를 거짓되고 불합리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초대 교황으로 간주되는 베드로를 제외하고 역대 교황 중 가장 오랫동안 교황직에 있었던 것으로 유명한 비오 9세(재위 1846~1878)는 가톨릭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사조 80가지를 <오류목록>(Syllabus of Errors, 1864)이라는 이름하에 작성하였는데 종교의 자유가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종교의 자유를 괴물이나 거짓, 오류 등으로 규정하면서 종교자유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가톨릭교회의 태도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가톨릭교회의 이러한 입장 배후에는 명제-가설(thesis-hypothesis) 도식이라고 불리는 것이 존재하였다. 이 도식에 의하면 ‘명제’는 이상적 인 것으로서 ‘규범(norm)’에 해당하고, ‘가설’은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로서 ‘예외(exception)’에 해당한다. 다소 낯설게 들리는 이 도식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도식에 의하면 가톨릭이 다수파로 존재하는 국가에서는 가톨릭교회를 국교로 지정하고 가톨릭 이외의 종교들에게는 공적 예배를 금지해야 한다. 이것이 이상적인 것으로서 명제이자 규범이다. 반면 가톨릭이 소수파로 존재하는 국가에서는 가톨릭의 국교 지정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톨릭교회의 공적 예배의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예외상태다. 따라서 공적 예배(포교 활동)의 권리를 최대한 활용하여 가톨릭을 다수파로 만든 뒤 국교로 지정해야 한다. 요컨대 예외상태(가설)를 벗어나 이상적 상태(명제)로 만드는 것이 가톨릭 교도의 의무다.
이 도식을 좀 더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이렇다. 가톨릭이 다수파로 존재하는 국가에서는 타종교의 종교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가톨릭이 소수파로 존재하는 국가에서는 가톨릭의 종교자유를 주장하라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이중성’ 혹은 일종의 ‘마키아벨리즘’으로 비칠 수 있는 이러한 논리의 배후에는 가톨릭교회의 오래된 공리가 존재한다. “오류는 권리를 지니지 못한다(Error has no rights)”는 공리가 그것이다. 이 공리의 역에 의하면 “진리만이 존재할 권리를 지닌다.” 그런데 가톨릭교회에 의하면 가톨릭은 유일하게 참된 진리에 근거한 종교이고 그 이외의 종교들은 오류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신의 ‘세속적 팔(secular arm)’로 간주되는 국가는 진리의 종교를 보호하고 오류에 빠진 종교의 확산을 방지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오류는 (존재할) 권리가 없다”는 공리를 폐기하고, “오류에 빠진 양심도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입장을 천명함으로써 그것에 근거한 명제-가설 도식도 폐지되었다. 이는 권리의 주체가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 구체적 인간임을 밝힌 것이며, 종교자유는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한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추상적 진리에 대한 열정이 살이 있는 인간의 자유를 압도했던 과거와의 과감한 단절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것이 있다. 미국 기독교 우파와 관련된 기독교 재건주의(Christian Reconstructionism) 지도자 개리 노스(Gary North, 1942-2022)가 종교자유와 관련하여 구사한 3단계 전략이다. 1) 기독교 학교 운영의 독립성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하여 종교자유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2) 종교적 중립이나 중립적 국가, 중립적 법은 존재할 수 없음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3) 이러한 교육과정이 끝나면 그들은 신의 적들(enemies of God)의 종교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즉 바이블에 근거하여 통치하는 국가를 세우려고 진력할 것이다.
이처럼 종교자유는 역사적으로 지난한 과정을 통해 획득된 인류의 고귀한 덕목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이와 동시에 특정한 세력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담론적 무기이기도 하다. 종교자유의 정치학(politics of religious freedom)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이진구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주요 저서로 《한국 개신교의 타자인식》, 《한국 근현대사와 종교자유》, 《한국종교학: 성찰과 전망》(공저), 《세속주의를 묻는다: 종교학적 읽기》(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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