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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종교총서완간에 따라 이어진 생각

 

news letter No.913 2025/12/16 

 

 

공부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우선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하나는 해오던 대로 하는 것이 다. 이미 주어진 공부의 노선이 제시되어 있고, 그에 맞춰서 하는 방식이다. 남들이 기대하는 바와 일치하기에 여기에는 온갖 응원 장치가 준비되어 있다. 이쪽 길을 택한 이는 특히 근면 성실함의 덕목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목표와 절차가 잘 구비되어 있어서 끈기 있게 따라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모범생의 길이라고 할만하다. 이와는 다르게 익숙한 길에서 일탈하여 이리저리 헤매는 것과 같은 방식도 있다. 여기에는 남들이 하지 않으니까 내가 한다는 투의 관심종자의 것과 어떤 기대에도 어깃장을 내려는 갑갑증 환자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 어쨌든 이들의 방식에는 정해진 대로는 하지 않겠다는 울뚝밸이 두드러진다. 주변의 기대와는 거리가 있기에 이른바 부랑배’(浮浪輩) 혹은 불량배’(不良輩)의 길이라고 보기 십상이다. 이들은 관심도 지원도 받기 어렵고, 선량한 모범생 동료들을 괴롭힌다는 혐의를 받기도 한다.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니, 당사자들이 그 대가를 감수해야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문제는 가뭄에 콩 나듯이 이들 가운데 방향 전환의 쓸모있는 길을 여는 자가 나온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들을 함부로 루저로 몰아 쓸어버릴 수 없게 만든다.

 

종교학의 영역에서 모범생의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앙의 합리화와 공고화라는 기독교 신학의 문제 틀에서 탈출하고자 하면서 종교학이 먼저 취한 방향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 요체는 세계종교 패러다임을 수용하고, 해당 종교 전통 창시자의 본래 가르침을 발굴하기 위한 경전 중심의 문헌 분석을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모범생은 우선 세계 유수의 종교 전통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 다음, 그 종교의 경전을 해석하며 창시자의 본뜻을 드러내고자 애쓴다. 그런 문헌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미 사라져 버린 언어를 배워야 하고 그 언어가 사용된 맥락을 면밀하게 검토하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수십 년에 걸쳐 갈고 닦아야 하는 이런 과정을 아무나 해낼 수는 없다. 선천적 능력과 후천적인 노력만으로도 부족하다. 사회적 지원 체제가 전적으로 가동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이 공부 방식은 인고의 학습 기간을 견뎌내고 사회적 지원을 받아낼 수 있는 소수 엘리트의 것이다. 옛적에 경전에 해당하는 문헌을 만든 이들도 엘리트였을 것이니, 현재 엘리트와 옛 엘리트가 아름답게 서로 수작(酬酌)하는 듯하다. 오늘날의 엘리트가 성실함으로 무장하고 이쪽 공부 길을 가겠다고 할 때, 주위 사람들의 찬탄과 격려가 있을지언정 시비를 건다든지, 구박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쪽에 펼쳐진 길은 평탄한 꽃길이다.

 

반면 멀미를 유발하는 울퉁불퉁 길에 스스로를 몰아넣으며, 종교를 연구한다고 돌아다니는 부류도 있다. 우선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자신이 파헤칠 종교 전통을 특정하지 않는다. 한 가지 종교 전통의 핵심 문헌을 깊이 파내는 대신, 이들은 다양한 종교의 여러 측면을 널뛰기하듯이 겅중거리며 횡보(橫步)한다. 모범생이 보기에 이들은 공부에 대한 끈기와 진지함이 없으며, 문헌학적 치밀함과 엄격성의 훈련이 결핍된 것 같다. 그래서 횡보생은 종교의 보편적 주제를 거론하고, 비교의 관점을 제시할 때에도 피상적이라는 평가를 받기 쉽다. 게다가 종교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정치, 예술, 과학 등 비()종교 분야에 대해서도 발언을 멈추지 않기 때문에 전문가의 절제와 신중함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모범생들은 그런 것을 주제넘은 월권으로 본다. 전문가의 발언이라면 마땅히 종교 영역에 국한되어야 하며, 다른 영역에 식견 없이참견하는 것은 학문의 상도의’(商道義)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지 않은 모범생들이 한 종교의 경전을 택해 진중하게 문헌 분석을 하지 않는 이들을 이단이나 방계 혹은 하급의 종류로 취급하려고 한다. 모범생이 늘 칭찬받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해바라기이고 주류(主流)에서 벗어나서 생존할 수 없는 종자인 반면, 울퉁불퉁 횡보생은 남들이 뭐라고 하든 흔쾌히 경계선을 넘나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주어진 틀에 따라 공부하며 그로 인한 긍정적 피드백을 즐기는 모범생과 우려의 시선을 묵살하고 제멋대로 공부하는 갈지자 횡보생이 마치 따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처럼 서술하는 것은 타당한가? 물론 그런 구분이 과장된 것임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 종교 전통의 문헌에 몰두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구분이 어떻게 그리 분명히 나누어질 수 있단 말인가? 마찬가지로 여러 종교 전통을 비교한다거나, 세속 영역 여러 가지 분야와의 관계에 관심을 갖는 것도 어느 한쪽의 독점물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이런 뻥튀기서술을 한 것은 또 다른 공부거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문제를 모범생과 횡보생 모두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걸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범생이 받아들이고 횡보생은 거부한 기본 문제틀이 우리에게 어떻게 등장하였으며, 지금 우리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느냐는 물음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하는 공부에 대해 우리가 군말 없이 받아들이거나, 사보타지하면서 거부하고 있다면, 그만큼 우리는 그 영향권 안에 속해 있고, 그 규정을 받는 바일 것이다. 결국 이 물음은 그동안 우리를 구성해 온 방식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로 이어진다. 예컨대 출발선에서 달려 나갈 준비를 하며 모여있는 달리기 선수들이 있다고 하자. 선수들은 자신의 근육 상태를 점검하며 저마다 목표지점을 바라보고 있다. 마음속은 다른 선수들보다 앞서서 뜀박질하여 승리할 수 있는 전략을 세우느라 분주할 것이다. 경기장의 승패에 초점을 맞출 경우, 이처럼 일단 강조해야 할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게임 자체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있다. “도대체 왜 우리가 이런 식으로 경주를 해야 할까?” “다른 방식으로 달리기 경주를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면 언제부터 우리가 이런 방식을 받아들였고, 어떤 경험을 하게 되었는지 관심을 갖게 된다. 사실 인문학이라는 분야가 권력 지배층과 유한층의 여유로움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고, 지속적으로 그 공고함을 위해 기여했다고 하더라도 현재에도 적지않이 쓸모가 있다면 바로 이런 종류의 질문을 할 때가 아닌가 한다.

 

부여된 여러 가지 조건을 우리가 그냥 받아들여서 하느냐, 마느냐의 차원에서 벗어나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에게 그런 조건이 등장하게 된 연고, 그리고 우리에게 미친 지속적이고도 광범위한 효과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특정 방향으로 질문을 하도록 만들면서 우리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구성방식 자체에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세 번째 공부는 앞의 두 가지 공부와 나란히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어서, 무엇보다 먼저 살펴봐야 할 성격을 지닌다.

 

 

이번에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이 완간한 5권의 한국근대종교총서가 출발한 문제의식은 바로 세 번째 공부 방식에 공감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총서를 관통하는 질문은 한국근대종교라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라는 것인데, 이미 질문 자체에서 이 총서의 역설적인 성격이 드러나 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의 자구(字句)대로일 경우, 고대로부터 면면하게 이어진 한국종교사를 전제로 해야 할 바이지만, 실상은 총서가 그런 관점에 대한 뒤집기의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불교, 근대종교로 태어나다.” 또는 한국근대종교란 무엇인가?”라는 제목부터 불편한 긴장감이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는 정치, 사회, 문화, 예술 등 인간의 보편적 영역 가운데 하나이며, 원시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됨을 구성하는 종교라는 관점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다. 총서의 필자들이 특정의 역사적 상황에서 만들어져서 그런 관점이 지배력을 행사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기 때문이다. 종교의 보편성은 애초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진 과정의 결과로 후광(後光)처럼 나타난 효과인 셈이다. 종교라는 큰 바구니에 담긴 여러 작은 바구니들, 즉 기독교, 불교, 이슬람, 유대교 등등의 이른바 세계종교 구성원도 마찬가지다. 종교라는 바구니에 담기기 전과 담겨버린 이후가 같은 것일 수가 없다. 이럴진대 상식에 부합하는 관점, 즉 특정 종교는 창시자가 처음 만든 이래, 많은 변화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항상성이 유지되었다는 관점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종교 개념 아래 포섭된 불교와 유교가 그 이전인 조선 시대에 존재했던 방식, 또 어떻게 달라졌는지 추적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불교와 유교 전통의 몇 가지 구성 요소가 계속 존속했다고 해서 체제의 동일한 연속성을 강변할 수는 없다. 여러 요소의 재배치 및 편성 원리의 변화는 특정 단위의 아이덴티티를 전면적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할 일은 많다. 조선시대 삼교(三敎) 중 하나였던 불교에서 근대기 종교의 하나로 탈바꿈한 불교로의 변환 과정을 더욱 치밀하게 밝히는 것(송현주), 왕조국가의 후원이 끊긴 유교의 위치 점검 및 자신의 전통 보존을 위해 고심한 유교의 변신 노력을 더 살피는 것(김순석), 그리고 유교 윤리가 근대화와 산업발전에 기여했다는 주장이 끊임없는 까닭을 논의하는 것 등이다.

 

앞선 불교와 유교에 비할 때, 개신교와 신종교는 이전의 전통과 연결점을 마련할 수 없이 등장한 것으로, 그야말로 돌출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의 타자인식은 외래의 개신교가 새로이 자신의 터를 잡기 위해 상대방을 어떻게 설정하고, 관계를 만들어갔는지 살피며(이진구), “한국신종교와 개벽사상은 밖의 세력도 아니고, 본디 있던 세력도 아니면서, 어떻게 많은 사람을 급속도로 끌어모아 강력한 구심력을 만들 수 있었는지 검토(윤승용)한다. 총서에서 개신교가 타자를 설정하고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관계망이 기독교 내부, 다른 종교, 그리고 세속 이데올로기라는 세 가지 영역에서 논의되는데, 아무래도 많은 사람의 관심이 세속의 정치 권력과 개신교의 역동적 관계에 모이므로, 할 일로서 동아시아 맥락의 비교 연구 등과 같이 보완될 연구 주제가 언급된다. 신종교를 다룬 총서에서 개벽사상은 한국의 근대적 가치를 대표하는 것으로 강조되어 있는데, 밖에서 들여온 것도 아니고, 이전에 있던 것도 아니면서 시대의 전환기를 맞이하여 일반 백성의 가슴 속에서 창발적으로 솟구쳐 오른 것이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한 뜻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 시기의 어느 하나 창조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띄엄띄엄 끊어진 점들을 이어서 하나의 연속선으로 만들어낸 불교도 그렇고, 파편으로 가득한 폐허 속에서 흩어진 조각들을 꿰매고 이어붙이는 일을 끊임없이 하며 상실감을 달래던 유교도 마찬가지다. 또한 개신교는 어떠한가! 쉴새 없이 타자를 만들어내면서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꾸미고 가꾸는 데 여념이 없지 않았던가!

 

이 총서는 구석기시대부터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진다는 종교의 보편성이라는 관점, 또 종교는 다른 세속 영역과 확연히 구분 혹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에게 언제부터 자리 잡게 되었는지, 그리고 종교를 거론하는 것이 어떻게 기독교, 불교, 이슬람, 유대교 등의 종교 전통에 대한 언급과 연결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관점이 우리의 상식이 되었는지를 묻고자 시작되었다. 이런 물음에 대한 검토는 여러 주제와 분야에 걸쳐있어서 단순하지 않으며, 쉽게 일단락될 수도 없다. 다만 논의가 활성화되는 단초 구실을 하면 충분하다고 본다. 처음에 프로젝트를 디자인할 때에는 과제를 종교 전통별로 나누는 대신 다른 분할 방식이 있는지 궁리하였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과제 분할은 프로젝트가 성숙한 단계에서야 가능한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총서의 참여 필자들은 많은 연구자들이 보다 결집하여 다른 방식의 재미있는 프로젝트가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장석만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한국근대종교란 무엇인가?》, 《한국 종교학 - 성찰과 전망》(공저)의 책과 <두 가지 몸의 늙음: 한국 근대 노년 관점의 변화>, <식민지 조선에서 여자가 운다>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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