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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달린 신화’를 넘어서
news letter No.915 2025/12/30

- Bruce Lincoln, Between History and Myth: Stories of Harald Fairhair and the Founding of the State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4)
지난 한 학기 동안 한국 건국신화 문헌을 읽는 대학원 수업을 진행하였다. 원래 관심 있는 주제이기도 했고(필자가 처음으로 들었던 학부 종교학 강의는 하정현 선생님의 ‘역사와 신화’였다), 학생들에게 비교적 친숙한 자료로 문헌 읽는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었다는 등의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계기는 브루스 링컨의 책에서 받은 자극이었다. 《역사와 신화 사이: 미발왕 하랄 이야기와 국가 창건》(Between History and Myth: Stories of Harald Fairhair and the Founding of the State)은 기원 신화의 일종인 ‘국가 창건 서사’, 한국 학계에 보다 익숙한 범주에 따르면 ‘건국신화’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직접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자료는 9세기 노르웨이의 흑왕 할프단(Halfdan the Black), 미발왕 하랄(Harald Fairhair) 등에 대한 고대 노르드 사가(saga)들이지만, 그 함의는 보다 폭넓은 영역과 관련되어 있다.
링컨에 의하면 국가는 기원 신화 형태의 창건 서사를 필요로 하는 제도다. 국가와 왕권의 설립을 정당화해야 하고, 내부의 긴장과 모순도 관리해야 하며, 국가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동시에, 그 기원을 초자연적인 것이라 주장하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 사건과 건국 이야기 사이에는 많은 미화와 왜곡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건국 사건이 오랜 과거에 일어났을 경우, 실제로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자체가 아니라 이야기 뿐이다. 이것은 건국신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난점이다. 동아시아의 경우에도 고대나 중세 신화 자료 속에서 국가가 세워질 당시의 역사를 복원하려 하는 관점과, 자료의 형성 과정 및 신빙성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며 실제 역사와 분리시키려 하는 관점 사이의 긴장이 연구사적 흐름을 형성해 왔다.
링컨은 그런 자료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연구자가 그 자료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건국신화가 실제로 보여주는 것은 행위(건국)의 순간이 아니라 서사(건국 이야기)의 순간이다. 노르드 왕들의 건국 이야기는 스칼드(음유시인)들의 시, 교회의 성인전, 왕조사 성격의 사가 등 다양한 장르의 여러 판본들로 전승되었다. 또 하나의 특수한 조건은 노르웨이 왕국의 첫 대왕(high king)이었던 미발왕 하랄이 통일 과정에서 각 지역의 여러 소규모 정치체들을 정복, 통합했으며, 거기에 반발한 이들 일부가 아이슬란드로 이동해 의회공화정인 아이슬란드 자유국을 설립해 13세기까지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르웨이의 건국 이야기는 왕조의 입장에서 건국자들을 찬양하는 판본, 그들을 비판하는 반왕조적인 판본, 그 두 입장을 교묘하게 뒤섞어놓은 13세기 이후의 판본 등 상이한 텍스트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각 텍스트의 편자, 청중, 그리고 스폰서가 누구인지에 따라 건국자들의 이미지와 행위에 대한 묘사는 그리스도교 도입 이전부터 지고신을 인식하고 있었던 ‘고귀한 이교도’로부터 야수적인 파괴성을 가진 야만인에 이르기까지 상이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 책은 원전에 대한 치밀한 독서를 통해 각 판본의 주제별 세부사항을 대단히 흥미로운 방식으로 비교 분석하고 있다. 건국 이야기의 어떤 요소가 집단 내에서 중요해질수록 그 디테일은 여러 판본에서 반복되며 더욱 정교하게 수정된다. 그 과정에서 각 이야기꾼과 청자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어떤 대목은 더욱 극적이거나 거창하거나 자극적으로 변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모호하게 얼버무리는 방식으로 은폐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같은 저자의 다른 책인 《신화 이론화하기》를 떠올리게 하는 논의이지만, 이 책의 결론에서는 과거 자신이 제시한 “신화가 서사화된 이데올로기라면, 학문은 주석이 달린 신화다”라는 유명한 테제에 대한 수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 문장은 내가 신화에 대해 쓴 책에서 최종적인 주장으로 제시되었으며, 아마 내가 쓴 어떤 문장보다도 자주 인용되었을 것이다. (...) 이 책에서 다룬 자료들에 대한 연구는 좀 더 나은 분석을 해보겠다는 결심에서 비롯되었고, 그 결과 나는 보다 미묘하지만 덜 경구적(epigrammatic)인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pp. 232-233)
수정된 서사의 범주는 이렇다. 이야기는 우선 중요한 과거의 사실을 재현한다고 주장하는 ‘허구’와 스스로를 상상력의 산물이라 인정하는 ‘비허구’로 나뉜다. 이에 따르면 ‘역사’와 ‘신화’는 모두 ‘비허구’에 포함된다. 다만 역사가 인간 행위자들만을 포함하는 가까운 과거의 사실을 이야기하는 데 비해, 신화는 비인간 행위자들을 포함하는 머나먼 기원, 다양한 형태의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차이가 있다. ‘역사’는 다시 스폰서(국가, 교회 등)의 이익에 복무하도록 설계된 ‘공식 역사’와 그에 대한 대안인 ‘비판적 역사’로 나뉜다. 또 ‘비판적 역사’는 공식 역사의 저항적인 변형인 ‘수정주의 역사’와 학문적인 접근에 해당하는 ‘인식론적 회의’로 구별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복잡한 분류지만, ‘역사와 신화 사이’에 있는 건국 서사들은 대개 이 이념형에 딱 들어맞지 않는 중간 범주에 속한다. 대부분의 건국 이야기는 국가나 왕권에 대한 태도에 따라 ‘공식 역사’나 ‘수정주의 역사’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위의 분류에 따른 ‘신화’는 아니지만, 전승되는 과정에서 초자연적 행위자, 기묘한 사건들, 새로운 시대의 출현 등의 요소들을 추가하면서 점점 ‘신화적’ 방향으로 옮겨간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여러 텍스트들 사이에는 경쟁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 어떤 판본은 망각되고, 어떤 판본은 후대까지 살아남고, 어떤 판본은 고전이 된다. 그렇다면 어떤 판본이 승리하여 살아남는가? 링컨은 일반화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하면서도 한 가지 명제를 제시한다. “변형이 양심적일수록, 성공할 가능성은 낮아진다.”
“역사적 서술이 스스로의 형성 과정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직면한 어려움과 지식의 결핍을 인정할수록 그것은 청중을 감동시키거나 집단 기억을 형성, 재형성하는 데 덜 효과적이 된다. (...) 반대로 어느 변형이 생생한 에피소드와 과장된 인물을 창조하고, 극적인 방식으로 사건을 구성하며, 청중이 만족할 만한 결말로 이끌어 갈수록, 그 이야기는 더 기억에 남고 따라서 더 효과적이 된다.”(p. 242)
이런 주장에 따르면, 아무래도 사람들은 사료 및 연구 방법의 한계, 그리고 연구자 자신의 오류나 편향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신중하게 지식을 전달하는 학자들의 이야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다. 대신에 출처가 불분명하지만 극적인 일화들, 자극적이며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기존의 선입견에 잘 들어맞는 ‘썰’들은 훨씬 쉽고 빠르고 널리 퍼져나가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학문도 이데올로기지만 비판(주석)을 통해 통제된다는 《신화 이론화하기》의 결론에 비하면 훨씬 낙관적이다. 우리는 덜 이데올로기적이고 덜 신화적인, 지적으로 겸허한 학문적 서사를 생산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은 인기가 없을 뿐이다.
한승훈_
한국학중앙연구원
《무당과 유생의 대결》, 《왕의 수명을 줄여라》(공저), 〈황선명의 민중종교사 연구〉, 〈17세기 함경도의 術儒 朱棐〉, 〈남만상인, 요술사, 반역자로서의 야소종문〉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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