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흙과 땅, 그리고 이야기는 이어진다

 

 

news letter No.914 2025/12/23

 

 

 

11월 마지막 주간에 리움미술관에서는 흥미로운 행사가 개최되었다. <In the Middle Voice: 다섯 개의 움직임>이라는 제목 하에 진행될 중장기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는, 인류학자 팀 잉골드(Tim Ingold)의 기조강연과 워크샵이 열린 것이다. 나는 25, 26일 양일간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때 느끼고 경험한 바를 간단히 소개하려 한다.

 

 

1.

그러면 산책을 떠나보겠습니다.”

 

첫날 잉골드의 강연은 이런 말로 시작되었다. 강연 제목은 <중동태의 자리에서 성찰하기: 대를 잇는 삶, 지각, 그리고 배움>이었다. ‘걷기에 대한 성찰로 시작된 강연은 능동태나 수동태가 아닌 중동태라는 관점의 전환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잉골드는 이를 지각(perception), 배움, 세대(generation)이라는 세 영역에서 살펴보았다.

 

지각에 대한 설명은 친숙하면서도 반가웠다. 내가 잉골드를 처음 접한 것은 2003년경 연구소에서 시작된 분류체계 분과 세미나에서였다. 세미나에서는 때로는 공통의 텍스트를 읽고 토론했고, 때로는 저마다 관심 분야의 텍스트를 가져와서 발제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이때 나는 무슨 생각에선지 종교학자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인물인 잉골드의 <The Perception of the Environment: Essays in livelihood, dwelling and skill>(2000)을 가져가서 그의 학문세계를 소개하고 여러 챕터를 발제하곤 했다. 이 책 서문에서 잉골드는 사회적 주체인 개인과 생물학적 유기체로서의 인간을 분리해서 사유하려는 경향에 저항하면서, “지각에 대한 생태학적 접근법을 통해 서로 다른 접근법들을 관통하는 실마리를 찾으려 시도했다. 이때 잉골드에게 많은 영감을 준 학자가 생태심리학자인 제임스 깁슨(James J. Gibson)이었다. 잉골드의 글은 여러 각도에서 내게 영감을 주었고, 그때 이후로 잉골드의 책들은 늘 내 책상 위 손이 닿는 곳에 놓여 있었다.

 

이번 강연에서도 잉골드는 깁슨을 수차례 인용했는데, ‘지각을 새롭게 개념화하며 그 중요성을 재발견하려던 시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상상력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했다. 아니, 잉골드는 지각과 상상을 결합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잉골드는 깁슨이 지각과 움직이는 몸을 결합하면서 항상 진행 중인 지각을 강조한 반면, 지각되는 세계는 미리 형성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잉골드는 세계 또한 항상 형성되는 과정 속에 있다면 어떨지 물음을 던졌다. 잉골드가 볼 때, 끊임없이 탄생하는 세계에서 지각은 상상과 분리되지 않는다. , “상상은 중동태의 지각이다.”

 

잉골드의 이야기는 교육으로 흘러간다. 그는 교육이 일련의 정신적 표상과 규칙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주류적 사고방식을 거부한다. 오히려 교육을 세상에 스스로를 열어 놓는 것, 그리고 세상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어포던스(affordance)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 사이를 주의 깊게 오가는 것과 관련된 무엇으로 제안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공부는 더 이상 혼자서 할 수 없다. 잉골드는 오히려 서로를 비워내는 행동”, 저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선물처럼 꺼내 놓고 서로 비워내며 만나는 사이 공간에서 배움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학생들을 세계와의 지속적인 대화 속으로 이끌어 함께 생각하고 함께 돌보는 가운데 진정한 공부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과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현대인들은 단계적 변화와 발달 개념에 너무 익숙해져서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것을 당연시하지만, 잉골드는 선조들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함께 나아가는 길을 제안한다. 결국 잉골드는 세계와, 서로와, 과거와 조응하며 함께 나아가는 이야기를 펼치고 있었다.

 

2.

다음날부터는 사흘에 걸쳐 잉골드와 함께 하는 만들기워크숍이 , 식물, 공기를 주제로 진행되었다. 나는 둘째날의 <땅 워크숍>에 참여했다. 워크숍 안내문에는 “‘만들기라는 행위를 통해 손과 재료, 몸과 환경이 서로를 감지하며 하나의 관계망을 엮어가는 과정 속에서배움이 무엇인지를 다시 물을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특히 <땅 워크숍>에서는 “‘이라는 물질을 매개로,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를 변화시키는 관계적 배움의 방식을 탐구할 것이라고 한다.

 

전날 강연이 진행되었던 장소에 들어서니, 공간의 배치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전날 200여 명이 빽빽이 앉아 있던 공간에 의자는 30여 개만 놓여 있고, 곳곳에 둥근 찰흙공이 원형으로 바닥에 놓여 있었다. 먼저 잉골드와 김주리 작가의 간단한 발제를 듣고 나서, 우리는 바닥에 큰 원을 그리며 놓인 찰흙 공들 앞에 주저앉았다. 잉골드는 주위 사람과 대화하지 말고 조용히 자신의 안내에 따라 달라고 말했다.

 

 

 

우리는 먼저 잉골드의 지시에 따라 저마다 앞에 놓인 커다란 찰흙 공을 집어 들어 네 덩어리의 작은 공들로 나누었다. 잉골드는 저마다 만든 네 공들 중 가장 오른쪽의 공을 집어서 어떤 유기체-그게 무엇이든-를 만들어보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때 이후 처음으로 찰흙을 만져보는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아무것도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지만 일단 손에 찰흙공을 들고 조물조물 만져보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꾹 눌렀더니 그 자리가 움푹 들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손의 움직임과 함께 어떤 형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리집 호두나무의 호두 말이다.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가며 나의 첫 작품, 호두를 만들었다.

 

 

잉골드는 첫 작품이 완성되었으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서 왼쪽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그 자리에는 내 왼쪽에 앉아있던 사람이 만든 어떤 형상이 놓여 있었는데, 그게 뭔지는 다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잉골드는 자기 앞에 놓인 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떤 모습이 되었을지 상상해서 그 모습을 만들어보라고 했다. 나는 내 옆에 있던 분이 만든 게 도무지 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버섯과 좀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우리집 마당의 표고버섯을 제때 따지 못했을 때의 퍼진 모습을 상상하며 모양을 만들었다. 잉골드는 다시 모두를 일어서게 했고, 다시 왼쪽으로 한 칸 더 움직이게 했다. 내 앞에는 알 수 없는 덩어리와 그것의 미래의 모습이 놓여 있었는데, 정말로 이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바야흐로 상상이 힘을 세게 발휘할 때가 왔다. 나는 첫 번째 덩어리에서 그 동물인지 식물인지 알 수 없는 유기체의 /, 두 번째 덩어리에서 껍질이 열리고 그 속에 놓인 속알/속씨를 상상해보았고, 속알/속씨가 조금 더 성장한 어린 모습을 상상해서 만들어 보았다.

 

 

한 차례 더 비슷한 활동이 이루어진 후, 이제는 처음에 만든 네 개의 공들 중 마지막 공으로 만든 작품들을 중앙에 작은 원형으로 놓으라는 지시가 이어졌다. 바닥에는 유기체의 형상들이 두 개의 원으로 놓였다. 중앙에는 커다란 찰흙덩이가 있었는데, 모두가 의논하지 않고 그 큰 덩어리로 무언가를 만들어보라는 지시가 이어졌다. 시간이 흘러 만들기 작업이 일단락된 후 전체를 살펴보니 중동태’, ‘서로를 감지하며 나아가는 관계적 배움에 대해 직관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그림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씩을 손에 들고 남산공원으로 올라갔다. 어느 순간 옆에 잉골드가 같이 걷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나는 나의 유기체-사람을 소중한 보물인양 손에 들고서 묵묵히 걸어갔다. 공원에서 우리는 저마다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장소를 찾아서 흙-작품-사람을 놓아두고 돌아왔다.

 

이제와 돌아보니, 이날의 모든 활동에 그의 강연의 요점이 스며들어 있었다. -비록 그것이 고도로 정제된 도예용 찰흙이라는 상품이었지만-을 만지는 가운데 지각과 상상은 분리되지 않았고, 말없이 만들고 이동하고 만들고 이동하며 어떤 흐름을 만들어내는 가운데 세대를 넘어 전수되는 앎에 대해, 관계적 배움에 대해 상상하고 감지할 수 있었다. 이날의 활동에 대해 짚어볼 지점이 한둘이 아니지만, 지면이 짧아서 일단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3.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잠깐 흙이 아닐 뿐이에요. 흙이었었고 흙으로 돌아갈 존재입니다.”

 

지난주에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기후위기 시대의 흙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펼쳐졌다. 인근 각지에서 모인 60여명의 다양한 농부들이 땅과 흙과 작금의 위기상황에 대한 고민을 나누었다. 이날 이야기 손님은 미네소타대학의 토양학 교수이며 <흙의 숨>의 저자인 유경수 선생님이었다. 그의 말대로, “흙은 인간이 가장 오래, 가장 깊게 경험한 자연이다. 현대인은 점점 더 흙에서 멀어지고 있지만, 어찌되었든 흙은 우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다양한 흙의 숨을 이어갈 것이다. 연말연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때다. 모쪼록 우리의 삶이, 나아가 우리의 연구가 흙에 좀 더 가깝게 펼쳐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유기쁨_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저서로 《애니미즘과 현대세계: 다시 상상하는 세계의 생명성》, 《생태학적 시선으로 만나는 종교》, 《바이러스에 걸린 교회》, 《아픔 넘어: 고통의 인문학》 등이 있고, 논문으로 〈인간적인 것 너머의 종교학, 그 가능성의 모색: 종교학의 '생태학적 전회'를 상상하며〉,〈‘병든 지구’와 성스러운 생태학의 귀환-생태와 영성의 현실적 결합에서 나타나는 종교문화현상의 비판적 고찰〉, 〈발 플럼우드의 철학적 애니미즘 연구: 장소에 기반한 유물론적 영성 개념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