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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농담, 수수께끼그 이후

 

news letter No.919 2026/1/27

 

 

그러니 그대 자신을 알라. 감히 신을 측량하려 들지 마라.
인간의 적절한 연구(the proper study of mankind) 대상은 인간이니,
우리는 이 중간 상태의 지협(isthmus)에 놓인 존재다.
어둡게 지혜롭고, 무례하게 위대하다.

...

태어났으나 죽어야 하고, 이성을 사용하나 오류에 빠질 뿐이며,
무지하기는 매한가지다.

...
만물의 주인이자 동시에 그 먹잇감이며,
진리의 심판자이면서 끝없는 오류(error) 속에 던져지는 존재.
이 세상의 영광이자, 농담이며 수수께끼(the glory, jest, and riddle).

 

-- Alexander Pope, An Essay on Man: Epistle II 일부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의 시 인간론(An Essay on Man)은 종교학자에게 남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 시 속 구절들이 몇몇 종교학자의 작업들을 직·간접적으로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예컨대 마지막 구절인 영광이자 농담이며 수수께끼는 조너선 스미스(Jonathan Z. Smith)1969년 예일대학교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The Glory, Jest and Riddle: James George Frazer and The Golden Bough) 제목이다. 스미스는 이 논문에서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 나타난 무수한 오류들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방대한 주석과 사례들을 원자료와 대조해 보며 그 맥락 하나하나를 재검토했던 이 작업은, 스미스 특유의 학문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 오류 분석은 프레이저를 단순히 틀린 학자로 판정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중에 스미스는 프레이저가 자신의 작업을 하나의 농담(joke)으로 만들고자 했다고 지적하며, 오히려 그가 의도적으로 실패(deliberately failed)했기에 더 흥미롭고 가치 있는 학자라 말했다 (J. Z. Smith, “When the Bough Breaks,” Map Is Not Territory: Studies in the History of Religions, 1978, 239). “오류와 실패, 그리고 농담은 이 지점에서 부정적인 결함이나 결핍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으로 암시된다.

 

조너선 스미스가 언급한 프레이저의 의도적인 실패농담의 의미를 이후 종교학자 샘 길은 좀 더 파고들었다. 스미스에 관한 그의 책 제목 종교에 관한 적절한 연구(The Proper Study of Religion: Building on Jonathan Z. Smith, 2020)가 다시 포프의 시 속 구절(인간에 관한 적절한 연구” the proper study of mankind) 환기시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샘 길은 스미스의 박사논문을 (스미스가 프레이저에 대해 했듯이 꼼꼼히 다시) 읽으며 “necessary double-face”라는 표현에 주목했다. “불가피한 이중적 얼굴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이 말을 샘 길은 스미스가 수행한 비교작업이 필연적으로 갖는 긴장으로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스미스가 말한 종교 의례가 출현하는 상황인간 현실의 부정합성(incongruity)과 구조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샘 길의 논리에 따르자면, 스미스의 책 종교 상상하기(Imagining Religion: From Babylon to Jonestown, 1982) 속 논문 의례의 벌거벗은 사실”(The Bare Facts of Ritual)에서 곰을 내가 죽였다곰이 내게 스스로 왔다,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명제가 모두 공존하는 상황,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속 디아나 여신의 사제가 죽음을 통해 죽음을 극복한다는 역설적 상황은 모두 이러한 이중적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적 얼굴이 작동하는 여러 장치들을 우리가 농담이라 부를 수 있다면, 농담은 그저 실없는 소리가 아니라, make-believe(~인 척하는 놀이)make belief(믿음을 낳는 과정)가 되는 유희로서의 농담일 것이다. 그래서 샘 길은 스미스의 종교학도, 더 나아가 인간의 종교도 모두 유희의 관점에서(sub specie ludi)” 이해 가능하다고 제안한다.

 

한편 종교학자 마크 C. 테일러(Mark C. Taylor)의 책 오류/방랑하기: 포스트모던 비/신학(Erring: A Postmodern A/theology,1984)‘error’라는 단어를 명시적으로 내세움으로써, 포프의 시 속 끝없는 오류 속에 던져지는(in endless error hul’d) 존재라는 구절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테일러의 error는 이 단어의 어원인 라틴어의 errare의 일차적 의미, 방랑하다와 더 밀접하게 연결된다. 테일러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erring이라는 개념, 즉 오류/방랑은 제거되어야 할 결함이나 부족함이 아니라, 시작도 끝도 없는 미로(maze)”와 같은 현실에서 절망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 책에서 그가 삶의 현실을 표현하며 사용한 미로라는 표현은 포프의 시 속 지협(isthmus)”과 다르지 않다. 만약 우리가 통과건너감의 성공 여부에만 집착한다면 이러한 미로와 지협은 우리에게 갇힘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불안한 공간일 것이다. 그러나 미로와 지협이라는 이러한 사이공간이 결국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사유하게 하며, 유희를 가능하게 하는 곳이라 생각한다면, 그 의미는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지난 해 연말, 서울 성북구 삼선동의 오래된 동네 교회를 개조한 공간에서는 <INSCAPE: NONSCENDENCE>라는 전시가 열렸다. 전시의 기획자 INSCAPE의 방재훈 감독은 과학, 철학, 종교 사이의 불가해한 버뮤다 삼각지대를 예술로써 표류하고 유희하고 공명하는, ‘수확 없는 수확제’”라는 전제로 이 전시를 기획했고, 전시에 참여한 세 작가이예주, 김영재, 피아 발타자르는 각각 영원성, 무상성, 그리고 그 둘 사이를 가로지르는 일식이라는 테마에 기반한 작품들로 이를 구현해 냈다.

 

그러나 이 전시의 진정 흥미로운 지점은 모든 것이 부유하며 결국 곧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점이다. 마치 전시 연계 살롱 토크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케이크 역시 곧 부서져 버렸듯이 말이다. 모든 것은 그저 어떤 지협/미로/사이공간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교회도 갤러리도 아닌 공간 속에서, 점멸하는 빛과 수증기, 차갑고 뾰족한 금속과 뜨거운 불에 연소된 라텍스의 긴장감, 천장에서 너울거리는 베일과 내려오는 빛의 변화들, 그리고 개념들 사이를 떠도는 살롱 토크의 무수한 말들까지도 결국에는 초월(transcendence)도 저월(subscendence)도 아닌, 논센던스, 무월(無越)’일 뿐이었다.

 

이러한 무월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언뜻 말장난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이것이 지협/사이공간이라는 삶의 조건 속에서 오류/방랑하며, 견고한 듯 보였던 세계가 무너지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절망하기보다 계속 또 다른 유희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그러한 수수께끼 같은 인간 삶의 일면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종교도 그리고 예술도 그러한 가능성의 하나이기에). 이러한 오류와 방랑, 농담과 유희가 열어주는 사유의 문과 자유의 은총은, 하나의 정답과 확신만을 추구하는 이는 결코 가늠할 수 없는 것일 테다. 그리고 또 다른 말장난처럼 느껴질지도 모르는 이 글 역시 그러한 오류/방랑의 흔적, 수수께끼에 다가가려는 또 하나의 시도일 뿐일 것이다.

 

 

* 이 글은 전시 <INSCAPE: NONSCENDENCE>의 연계 살롱 토크에서 행한 발표에 기반해 쓰였습니다.

 

 

 

 

 

최화선_
서울대학교
논문으로 <“씌어지지 않은 것을 읽기”: 점술의 사유와 이미지 사유>, <이미지와 응시:고대 그리스도교의 시각적 신심(visual piety)>,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 남장여자 수도자들과 젠더 지형>, <기억과 감각: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의 순례와 전례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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