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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신화 만들기’가 시사하는 것

 

news letter No.951 2026/9/8

 



 

한 작품의 생존 여부는 물리적 보존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끊임없이 인용하는 것에 달려있다. 신들과 전쟁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음송되고 기억되다가 호메로스의 서사시로 기록되었다. 그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서양 문학과 대중문화의 원천으로 지금까지 문학, 미술, 공연, 영화 등에서 많은 작가들에 의해 재해석되어 새롭게 탄생을 거듭하며 새로운 신화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필자가 주목한 것은 그의 대서사시는 정작 고대 그리스에서는 추방되었지만, 오히려 그리스어권이 아닌 유럽과 영어문화권에서 고전으로 필독 교양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한때는 그리스의 국민 교과서였다는데, 무슨 일이 있었길래 호메로스를 비롯한 시인들의 시가 해체의 길을 걷게 된 것일까?

기원전 6세기~4세기 뮈토스와 로고스의 투쟁은 시인들이 가졌던 정치 사회적 영향력, 특히 청년들에 대한 교육의 주도권을 철학자들이 넘겨 받기 위한 것으로 상당히 극적이었다. 플라톤은 크세노파네스에 이어 시인과 시를 향해 많은 비난을 퍼부었다. 특히 시의 주제와 관련하여 《국가(Politeia)》 378cd에서 다음과 같이 격분하며 비판하였다.

신들끼리 서로 전쟁을 하고 음모를 꾸미고 싸움질을 한다는 이야기도 사실이 아닌 만큼 허용해서는 안 되네. 만약 우리나라를 수호할 사람들이 까닭 없이 남과 사이가 나빠지는 것을 가장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그들이 기간테스(Gigantes) 사이의 전쟁이나 그밖에 신들과 영웅들이 친족과 가족에게 보인 온갖 적대행위를 듣거나 겉옷에 수놓지1) 못 하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하네....헤라 여신이 아들에게 포박됐다는 이야기, 얻어맞게 생긴 어머니를 편들다가 헤파이스토스가 아버지에 의해 내던져졌다는 이야기, 호메로스가 들려주는 신들끼리의 전투는 비유로 말한 것이냐를 떠나서 받아들여서는 안 되네, 아이들은 비유인지 비유가 아닌지 구별할 수도 없기 때문일세.

이 인용문을 보면 플라톤은 크게 두 가지를 우려했다. 우선 시인들은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지어내서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는 것이다. 또 시의 주제를 문제 삼았다. 신들 사이의 전투는 시민 분쟁을 촉발하고, 저승 세계의 이야기는 병사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그리고 신들을 부도덕하게 묘사하여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용으로 부적합하다고 판정을 내렸다.

시인들은 무사(Mousa) 여신들로부터 ‘말해진 것’, 뮈토스를 전했다. 헤시오도스는 《신들의 계보(Theogonia)》 서사(prologos)에서 여신들이 그에게 시인이 되도록 말을 걸었다고 했다. 이 책 22-23행에서 “어느 날 그분들은 나 헤시오도스가 신성한 헬리콘산 기슭에서 양떼를 치고 있을 때 아름다운 노래를 가르쳐 주셨다.”고 했고, 31~32행에서 “신적인 목소리를 내게 불어넣어 내가 미래의 일과 과거의 일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하셨다”라고 적었다. 신의 힘이 실린 뮈토스의 권위를 짐작할 수 있다. 시인들은 악기의 반주에 맞춰 시에 멜로디를 붙여 음송했고, 이후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직업적인 가인(Aoidos)이 등장하여 신들과 인간들의 업적을 노래했다. 또 음유시인(Rhapsodos)은 손에 막대기를 들고2) 음송했다고 한다.3)

시인들의 음송은 청중의 마음을 움직여서 치유와 회복의 기능도 했는데, 플라톤은 시인이 청중의 감정을 자극하고 그들을 조종하는 것을 우려했다. 그에게 시는 실재의 모방으로 청중을 만족시키는 미메시스의 기술이므로 그들이 진리 추구에 전념하는 대신 이미지만 소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시인이 신적인 영감을 받은 자로서 지상의 모든 인간으로부터 존경받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그는 그것을 시인의 권위를 깍아내리는 이유로 활용했다. 시인은 ‘신적인 광기(divine madness)’ 상태에서 무슨 말인지도 모른 체 여신들의 말을 전할 뿐, 자기 자신의 앎에 근거한 말은 못 한다는 것이다.4) 그는 ‘우주를 짓는 자’에 비유될 정도로 위대했던 시인의 명예와 권위를 한껏 폄하했다.

구술문화에서 전통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것은 시의 언어, 운율, 선율 그리고 반복되는 관용어구였다. 시는 사회의 핵심적인 매체였을 뿐 아니라 가장 권위 있는 담론이자 문화적 재생산의 도구였다. 하지만 문자 사회로 넘어가면서 큰 변화가 불가피했는데, 호메로스를 비롯한 시인들의 세계와 기원전 4세기 철학자들의 세계 사이에 그 변화는 뚜렷하게 나타났다. 마르셀 데티엔(Marcel Detienne)은 당시 철학자들의 기세등등한 공세를 두고 ‘지속적인 소동’, ‘스캔들 상태’라고 묘사했다. 이와 같은 담론적 헤게모니가 걸린 투쟁으로 시인들의 뮈토스는 플라톤에 의해 ‘추악한 거짓말’로 규정되어,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로고스와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플라톤 이전의 고대 그리스의 로고스/뮈토스의 복잡한 함의들을 고려해야겠지만, 뮈토스는 로고스에 상반되는 것으로 고착하여 근대 이후 신화 연구에 규범적으로 작용해 왔다. 흥미로운 것은 플라톤은 시를 해체하는 일에 앞장섰음에도 불구하고 호메로스, 헤시오도스의 뮈토스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국가》 614b~621d에 실린 사후세계에 관한 에르(Er) 이야기가 있다.

팜퓔리아(Pamphylia) 출신인 아르메니오스의 아들 에르는 전사(戰死)했는데, 열흘 뒤에도 그의 시신은 썩지 않았다. 고향으로 운구된 그는 열이틀째 되던 날 장례를 치르기 전에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 누워 있다가 되살아나서 저승에서 본 것들을 들려주었다. 저승의 혼들은 자기가 저지른 불의에 대해 10번을 되풀이해서 벌을 받아야 하고, 피해자에게 10배로 보상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선행을 행한 적이 있거나 올바르게 처신한 적이 있다면 같은 비율로 보답을 받는다. (중략) 에르에 따르면 개개의 혼들이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데....아가멤논의 혼은 자기가 당한 불행 때문에 인간 종족이 싫어서 독수리의 삶을 선택하였고...마지막 순서인 오뒷세우스의 혼은 전쟁의 갖가지 노고를 잊지 못한 그는 명예욕도 시들해져서 일반인의 삶을 기꺼이 선택했고....한밤중이 되자 천둥이 치고 땅이 흔들리더니 저마다 태어나기 위해 유성처럼 사방으로 흩어지고....이른 아침에 눈을 떠보니 자기가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 누워 있더라는 거야.

플라톤은 이것을 들려주고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믿으면 그 이야기가 우리를 구제해 줄 거라고 했다.6) (뮈토스를 오늘날 용어 ‘신화’에 그대로 대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는 ‘진실한 신화’, 시인들이 만든 것은 ‘거짓 신화’라고 함으로써 신화에 대해 진실/거짓이라는 두 입장을 취하며 일구이언을 했다. 거칠게 표현하면, 합리적으로 만들어져서 가치 있는 이야기와 불합리하게 만들어져서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이야기를 구분하며 플라톤은 신화에 대해 양가적 태도를 취한 셈이다. 따라서 그가 신화를 해체하고 새로운 신화를 만드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뮈토스/로고스라는 대립구도 뿐 아니라 뮈토스 내에서 어떤 이야기를 허용하고, 어떤 이야기를 배제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중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지하듯이 근대 국가가 성립될 무렵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신화 만들기’가 활발히 이루어졌었고, 이에 따른 신화에 대한 참/거짓 문제는 논쟁거리였다. ‘신화인가, 신화가 아닌가’의 문제 이전에 신화라는 범주 내에서 어떤 신화는 ‘진실한 신화’, 어떤 신화는 황당무계한 ‘거짓 신화’라고 구분하는 플라톤이 남긴 문제가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근대 신화학 이래 낭만주의와 계몽주의 노선에 따른 신화 담론에 대한 성찰에도 이 문제를 지나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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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테나이 처녀들은 해마다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는 겉옷에 그런 장면을 수놓았다고 한다. (천병희 역, 《국가》, 숲, 2017, pp. 130-131, 각주 31).

2) 천병희, 〈호메로스의 작품과 세계〉, 《일리아스》,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6, pp. 617-618.

3) 지난 2주 연속 연구소 뉴스레터의 흥미로운 주제였던 영화 〈오디세이(The Odyssey)〉와 이 글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영화에 등장한 미국인 래퍼 트레비스 스캇(Travis Scott)의 연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막대기를 내리치며 청중을 압도하며 음송하는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상상력이 반영된 새로운 신화의 한 장면이다.

4)《파이드로스》 265ab, 재인용. Bruce Lincoln, Theorizing Myth: Narrative, Ideology, and Scholarship,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9, p.38. (김윤성 외 역, 〈호메로스로부터 플라톤을 거쳐〉, 《신화 이론화하기》, 2009, 참조)

5) 플라톤, 앞의 책, p. 129.

6) 플라톤, 앞의 책, p. 611.

 

 

 

하정현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1920-30년대 한국사회의 '신화'개념의 형성과 전개>, <근대 단군 담론에서 신화 개념의 형성과 파생문제>,〈신화와 신이, 그리고 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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