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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202호-종교와 폭력의 문제(장석만)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2. 3. 28. 18:06

종교와 폭력의 문제

2012.3.20

* 이 글은 2012년 2월 17일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린 “한국의 종교전쟁, 한국에서 종교성은 정치와 어떻게 조우하는가?”의 기조 발제문 가운데 발췌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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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종교와 폭력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에는 언제든 폭력으로 변질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원래 종교는 폭력적이 아니지만, 간혹 변질되는 경우에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종교 자체의 폭력성을 주장한다. 변질이 되어 종교가 폭력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는 본래 비합리적 폭력이라는 것이다. 폭력이 악이라고 한다면 전자는 종교는 원래 선한데 가끔 악으로 변질된다는 것인 반면, 후자는 종교 자체가 악이라는 것이다. 그 차이는 종교를 일부만 폭력과 연관시키느냐 아니면 전부 연관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종교가 본래 폭력적이라거나 사악하다는 주장은 자못 통쾌한 편이 있어서,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인기가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군림하는 것은 종교를 전부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범위를 벗어난” 종교만 정죄(定罪)하는 관점이다. 이 때 종종 인용되는 것이“목욕물 버리면서 아기까지 내버려서야 되겠는가?”라는 이름난 구절이다. “범위를 지키고 있는”종교는 폭력화할 가능성이 없으므로, 울타리를 벗어난 것만 처리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제자리에서 벗어난 것을 여전히 종교라고 간주해주느냐 아니냐에 따라 관점이 다르게 된다. 후자의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에, 원래 범위에서 벗어난 것은 “사이비종교”“유사종교” 혹은 컬트(cult) 등의 용어로 일컬어진다. 종교의 범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종교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일본 도쿄 지하철 살인 사건을 일으킨 오무신리쿄(オウム理)를 매스컴에서 종교 취급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하지만 이미 종교라고 인정을 받고 견고하게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거대집단의 경우에는 이런 식의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잠시 일탈한 것을 선도(善導)하여 제 자리에 돌려놓으면 충분히 만족할 만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조지 부시가 자신의 근본주의적 신앙심과는 달리, 박멸 대상은 단지 무슬림 테러리스트만이라고 주장한 것도 리버럴리즘의 이런 대세 때문이다.

종교가 지켜야 할 제 자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종교를 개인의 신앙심이라는 영역에 있도록 만들고, 정치의 영역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개인의 종교 자유를 보장하고,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 자리를 지키는 종교끼리 서로 관용을 베푸는 종교평화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간혹 종교 자체를 폭력적이라고 보고, 배제하려는 자도 있긴 하지만 사실 이런 관점은 현실 정치에서 힘이 없다. 반면“종교 본연”의 영역을 주장하는 관점은 서구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특히 포스트 9.11 시대에 좌파와 우파는 다른 사안에서는 서로 이견(異見)을 보이지만,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같은 견해를 주장하고 있다.

서구의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이처럼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게 만드는 인식의 배후에는 유럽 역사에 대한 특정한 해석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에 대한 “물론”(勿論)의 태도, 즉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없다”는 자세가 암암리에 관철되고 있다. 그것은 16-17세기 유럽에서 벌어진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을 “종교전쟁”의 대표적 사례로 간주하고, 그로 인한 참혹한 결과를 극복하기 위해 근대의 국가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관점이다. 그때처럼 종교가 정치에 간섭하고, 이른바 공적인 영역에 개입할 경우에는 끔찍한 폭력이 드러나게 되므로, 종교는 사적(私的)인 영역에 묶어두고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국가가 종교를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의 자유는 그럴 경우에만 부여되는 한정적 권리인 셈이다. 이런 조건이 확립되면서 비로소 서구의 근대성도 정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의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 근대국가가 나타났고, 국가의 등장으로 유럽의 평화가 찾아오게 되었다는 주장은 하나의 “썰”(說)에 불과하다. 오히려 그것은 교회로부터 권력을 인수한 근대국가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련한 이데올로기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점은 근대국가가 등장해서 과연 얼마나 폭력이 감소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감소하기는커녕 이전 보다 대규모의 살육과 체계적인 폭력이 자행되지 않았는가? 유럽의 역사에서 배태된 이런 “종교와 폭력”의 연관성은 점차 리버럴리즘이 정착하게 되면서 정교분리, 종교자유의 관점이 근대사회의 기본“원칙”으로 굳어지게 되었고, 구미세력이 비유럽 지역으로 확산되는 식민화의 과정에 따라 “문명의 보편적 원리”라는 포장으로 전 세계로 수출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점은 종교와 폭력 사이에 긴밀한 연관성을 주장하는 관점이 현재의 체제 유지에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물음은 종교의 폭력이 보이지 않게 작용하고 있는 구조적인 폭력보다 유독 우리의 관심을 끌만큼 더 잔인하고 참혹하다고 과연 말할 수 있느냐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전 세계 군사비 가운데 70%에 가까운 비용을 사용하고 있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중국,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전 세계 군사비의 거의 반(半)을 사용하고 있는 미국의 행태 (2007년을 기준으로 할 때, 미국의 군사비는 하루에 12억불)를 보라. 그리고 200개 다국적 기업이 전 세계 경제 활동의 1/4를 점유하면서도 노동력의 1%만을 고용하고 있는 상황 및 더욱 확대되고 있는 부(富)의 양극분해를 보라. 거기에 내재되어 있는 심층적인 폭력은 쉽게 감지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 폭력이 심각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쉽게 눈에 띠는 종교적 폭력에 대해 주목하는 만큼 혹은 그보다 더 구조적 폭력의 문제가 강조되어야 마땅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혹자는 이런 관점을 두고 종교 외피(外皮)설의 변종이라고 오해할지도 모른다. 종교 폭력은 경제적 착취와 같은 하부 모순을 왜곡하여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라는 식의 논의 말이다. 그러나 종교적 폭력이 쉽게 가시화되는 이유는 하부구조의 외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만을 부각시키는 인식틀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종교와 폭력의 연결을 내세우면서 종교와 정치, 종교 자유 그리고 종교와 세속 관계 등 여러 가지 측면과 네트워크를 이루면서 근대적 권력 장치로서 작동하는 것이다.

종교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의 문제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동시에 문제 제기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종교와 폭력의 담론은 이 심층적 폭력에 대한 주목을 피하게 만드는 은폐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경우 종교적 폭력은 일종의 포르노그래피 기능을 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맥락을 도외시하고 특정 부분만 반복해서 보여주면서 우리의 눈을 “게슴츠레”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포르노그래피 아닌가?



장석만_

종교문화비평학회 회장


stonemann@daum.net


논문으로 <민족과 인종의 경계선:최남선의 자타인식>, <인권담론의 성격과 종교적 연관성>, <한국신화 담론의등장>등

이 있고, 저서로 ≪종교 다시읽기≫(공저), ≪한국 근대성 연구의 길을 묻는다≫(공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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