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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인간답게 리모델링하자
-유교 윤리와 유학의 철학적 대안이 필요하다
2012.3.6
사회는 풍요롭게, 개인은 검소하게. 일본 경단련 회장을 지냈고 경영의 구루로 명성을 떨쳤던 도코 도시오 도시바 회장의 경영철학이다. 도코 회장의 이러한 신념은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치가 유교적 가치관을 기업 활동에 반영했던 전통과 맥이 닿아 있다. 메이지 이후 일본 자본주의 형성과정과 이후의 발전 형태를 볼 때 이러한 정신은 특정 경영자 한 사람의 좌우명이라기보다는 일본 지도층 전반의 국가관, 경제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신자유주의적 시장논리 때문에 근래 들어 많이 퇴색했다고는 하나, 이른바 일본식 경영의 ‘三種의 神器’라고 하는 평생고용, 연공급여, 기업별 노조 역시 여전히 일본 경제의 핏줄을 흐르는 지배적 특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경제와 사회를 관통하는 이러한 철학적, 윤리적 전통이 오랜 경제침체 속에서도 일본 사회의 안정을 유지해온 근간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똑 같은 시장경제 체제 속에서도 일본이 한국과 달리 정의의 문제, 부패의 문제, 불공정의 문제, 대기업 탈선과 천민성의 문제가 현격히 덜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양극화, 복지, 청년실업, 비정규직, 출산감소 등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에 대한 해법은 단순히 정부 정책 운용과 기업 활동에 대한 현상적 접근만으로는 찾아지기 어렵다. 보다 근원적이고 높은 차원의 문제 제기와 담론 구조의 형성 없이는 지난한 과제라는 점에서 이 문제에 대한 종교학의 역할을 새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종교의 목적은 인간 고통의 완화와 상처의 치유에 있다. 그 종교를 학문의 대상으로 하는 종교학이 사회의 모순과 병리, 더욱이 개인의 제어되지 않는 탐욕에서 비롯되는 사회 구조적 고통의 완화에 주목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일본 자본주의는 한마디로 공동체 자본주의다. 공동체와 자본주의가 결합한, 어쩌면 모순된 경제체제가 가능했던 것은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유교 철학의 반영과 내재화 때문이다. 반면 우리한테 유교, 특히 조선시대 성리학은 그저 나라 말아먹은 종교 혹은 철학으로 간주돼 왔을 뿐이다. 우리는 자체의 아무런 지적, 사상적 필터링 없이 서구의 시장원리와 경쟁논리에 길들여져 오늘에 이르렀으며,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IMF사태와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지금의 고통과 모순은 확대되고 구조화되어 왔다. 따라서 見利思義의 정신과, 군자는 부족할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않을 것을 걱정한다는 철학을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따뜻한 자본주의와 조화시킬 이론적․현실적 모델이 절실하지 않을 수 없다. 隨時處中의 가르침이 분배의 정의나 경쟁의 공정성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毋自欺와 愼獨이 무차별적인 마케팅의 부작용과 폐단에는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인간의 이기가 자동적인 기제를 통해 남의 이기와 조화를 이룰 것이라는 서구 자본주의의 전제를 善惡이 시작되고 正邪가 갈리는 내면을 조심하라고 한 주자의 가르침으로 시정하거나 보완될 수는 없는지, 獨立不懼하고 遯世無憫하라는 경구는 현실 노후 대책과 어떻게 관련지을 수 있는지, 양극화에 따른 또 다른 신분 고착화 현상을 제어할 철학적 종교적 안전장치는 모색될 수 없는지 ... 의문을 가져야 하고 학문적 고민이 있어야 할 때라고 믿는다. 이런 의문과 과제들이 종교학과 전혀 관계가 없는 타방의 영역이라고만은 생각되지 않는다. 종교학이든 동양학이든 문학이든 인간의 고통이나 연민을 개체로서만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코 고답적이지도 관념적이지도 않다. 1929년 미국 대공황을 극작가 아서 밀러는 경제적 위기가 아니라 윤리적 위기라고 파악했다. 2007년 금융위기와 지금의 고통은 당시보다 질적으로 훨씬 악화됐다는 점에서 아서 밀러의 통찰에서 추호도 벗어날 수 없다. 이렇듯 자본주의의 대안이나 보완작업은 사회과학적 방법론이나 정책학적 접근만으로는 이뤄지기 어렵다. 인간 본성에 관한 종교적 철학적 탐구와 그것의 사회화를 통한 전체의 공유가 있고서야 비로소 경제 논리와 경영학적 시각으로는 불가능한, 경주 최부자의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는 가르침이 공허한 전설로만 남아있지 않게 된다. 인식이 이루어져도 행동으로 옮겨지기 어려운데 하물며 아무런 인식도 없는 바에야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종교의 핵심은 기복이라고 본다. 그 복은 주역의 관점대로 避凶取吉의 문제이고, 그 길흉은 득실의 문제이며, 득실은 곧 먹고사는 문제가 된다. 최근의 안철수 현상이나 분배와 나눔의 본질도 결국 기복이며 길흉이며 득실이며 먹고사는 문제라는 점에서 종교학을 포함한 인문학은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여러 비판적 담론이나 대안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은 하나같이 사회주의자였다. 갈 수 없는 길이고 도달할 수 없는 꿈이기에 그런 가르침을 목표로 했는지 모르지만, 종교가 말마따나 으뜸의 가르침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고기가 물을 떠날 수 없고 뭍 생명이 공기를 벗어날 수 없듯이 이제 다시 시장경제를 등지거나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세상을 추구할 수는 없다. 그러니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자본주의를 인간답게 리모델링 해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은 현실적 당위이며 다수의 희망이다. 일본의 유교 자본주의가 눈에 들어오는 이유이다. 몇몇 업종에서 일본을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지만 그 원천과 깊이에서 아직도 배울 것이 너무 많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언제 제대로 된 시장경제를 해 본적이 있는가. 모든 시장은 독과점적이고 모든 경쟁은 불공정하기에 한국의 자본주의는 정상적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제대로 자본주의 한번 해보자, 제대로 된 경쟁시장 한번 가져보자 하면 대한민국 어느 재벌이 달가워하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유교 윤리와 유학의 철학적 대안이 지금 우리 경제와 사회가 안고 있는 병리에 대한 처방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유리하면 시장원리이고 불리하면 사회주의나 포퓰리즘으로 재단하는 불합리가 과연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주류 경제학이나 경영학의 현상 분석과 숫자적 계량만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종교적, 철학적 접근, 특히 유교적 접근이 그래서 요구된다. 출세간의 불교나 노장은 이 과제를 담당하기에 적절치 않다고 보기에 그렇다. 경영기법이나 전략보다 철학과 종교적 신념이 중요하다. 제대로 된 경제철학, 경영철학 없이 진정한 국민후생도 지속가능한 기업도 없다. 고용이나 비정규직 문제가 단지 생산성과 비용 차원의 문제이겠는가. 그런 점에서 유학은 우리를 구원할 거대하고 심오한 사상체계이며, 정책판단의 준거로 삼을 만하다. 당장의 가시적 성과가 없더라도 한국 경제에 대한 종교학 차원의 거시 담론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전문가들의 적극적인 관심이 아쉽다.
정성채_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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