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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205호-선교, 종교와 정치의 이종교배(이창익)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2. 4. 12. 17:55

선교, 종교와 정치의 이종교배

2010.4.10



한국에 처음 들어온 개신교는 교육과 의료라는 문명의 매체를 통한 선교 사업에 매진했다. 근대적인 세속사회의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교육와 의료에 종교를 결합시켜서 종교와 비종교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문자를 가르치고 몸을 치료하는 종교의 이미지는 해당 종교가 성공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현재 많은 종립학교에서 종교교육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에 대해서 마땅한 공적 입장을 취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교육을 위해 가장 많이 헌신을 한 기독교가 학교 커리큘럼에 살짝 종교라는 토핑을 얹겠다는 것에 대해서 인정상 그 정도는 봐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사회적인 정서가 있는 것이다. 여전히 한국 사회는 학생들의 종교적 감수성이 일방적인 종교 교육에 의해서 희생되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예민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한국에 존재하는 종교들의 교세는 학교를 몇 개나 소유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서열화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어마어마한 부의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대학 설립은 많은 종교들의 꿈이기도 할 것이다. 대학을 통해 종교를 학문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는 전략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와 학문의 강력한 접합 및 교환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선교적 영향력을 사회 전반에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학법 개정 과정에서 대부분 기독교계 종립학교는 ‘건학 이념’을 내세우면서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현재 대부분의 종립학교는 학교를 해당 종교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지 결코 공적 자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사립학교라는 틀에 종교라는 아우라를 덧입힐 때 학교는 무소불위의 종교적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교권 침해문제부터 시작해서 종교에 대한 박해 등의 논란까지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정부도 사법부도 종교라는 벌집을 가급적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하기 때문이다. 사학법 개정을 통해서 개방형 이사제를 도입한다고 했을 때,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재산권 침해의 문제였을 것이다. 내 돈을 내 마음대로 쓰겠다는 데 왜 국가에서 참견하느냐는 정서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학생들의 등록금과 국고지원금으로 이제는 종교가 버젓이 선교활동을 하더라도 이것을 견제할 만한 장치가 거의 없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사학법 개정을 저지하기 위해서 많은 기독교계가 종립학교는 폐교와 신입생 배정 거부 등의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 사학법 개정에 반대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종교가 학교를 바라보는 시선을 짐작하게 된다. 학교는 종교의 포교장일 뿐만 아니라 종교의 가장 중요한 선교 재원이기도 한 것이다.


요즘에 기독교 재단에서 세운 국내 제1호 민영교도소인 소망교도소가 종교 편향과 선교 문제로 논란을 겪고 있다. 소망교도소는 부지와 건물만을 기독교 재단에서 마련했을 뿐 연54억원의 재원을 정부에서 지원받고 있기 때문에, 이제 죄수들을 상대로 하여 기독교가 국가의 지원 아래 교도소 선교를 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을 낳고 있다. 사실 교도소는 종교가 가장 좋아하는 개종의 공간이었다. 마치 원시인을 문명인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죄인를 선인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선교 모델에 가장 어울리는 일일 것이다. 최근에 소망교도소에 대한 불교계의 공격이 거세지자, 기독교 쪽에서는 템플스테이나 불교문화재 등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불교도 마찬가지로 국고지원에 의한 종교적 혜택을 입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국가와 종교는 이제 거의 숙명적인 의존 관계 속에 놓여 있다.


원래 교도소는 18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기독교인들에서 의해서 만들어진 발명품이었다. 그 이전에 범죄에 대한 처벌은 신체형이 일반적이었지만, 이제 일정한 곳에 감금하여 범죄자의 자유와 시간을 제거하는 것이 처벌의 일반적인 방식이 된 것이다. 범죄를 저지르면 교도소에 가야 한다는 근대 사법의 처벌 방식은 많은 부분 기독교적인 죄의 관념에 기초하고 있다. 어찌 보면 국가의 가장 종교적인 장소가 바로 죄를 정화하는 교도소인 것이다. 교도소는 처벌의 장소가 아니라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는 장소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종교적으로 프로그래밍된 공간이다. 기독교와 교도소의 결합은 근대국가에서 종교가 가장 적극적으로 가시화되는 장소이며, 어떤 학자는 그러한 종교의 모습을 ‘프리즌 릴리전’(prison religion)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교육과 종교의 결합을 통해서 종교는 말랑말랑한 학생들의 정신을 향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가장 종교적인 공간을 창조한다. 마찬가지로 교도소와 종교의 결합을 통해서 종교는 조르조 아감벤이 말하는 법적 보호 영역 밖에 존재하는 인간들의 장소, 즉 ‘호모 사케르’의 영역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창출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들어 이루어지는 기독교 선교는 그러한 법적 보호 밖의 공간을 주로 겨냥하고 있다. 전쟁과 자연재해로 인한 난민, 탈북자, 불법체류자, 다문화 가정은 모두 국가의 견고한 틀 밖에서 부유하는 존재들이다. 특히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선교에서 보았던 것처럼 이슬람 세계와 같이 전쟁으로 초토화된 곳은 기독교가 가장 좋아하는 선교의 공간이다. 기독교 선교의 역사는 항상 그렇게 종교와 국가의 틈새에 존재하는 모호한 공간을 공략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적인 장에서 이루어지는 기독교의 공적 선교는 단지 병리적인 일탈 행위가 아니라 매우 근대적인 종교 현상의 하나로서 서술되어야 한다. 이제 기독교는 교회가 아니라 학교와 교도소에서 가장 기독교 다운 모습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최근에 종교인과 종교단체에 대한 과세 논란이 불거지자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기독교에 대한 모독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영적인 일을 하는 목사를 밥벌이를 하는 노동자로 취급하는 처사이고, 교회를 상업적인 매장 정도로 생각하는 불경한 언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지닌 자기 종교에 대한 이념적 기대 때문이다. 현실세계에서 목사들은 여전히 교회의 재산을 개인의 재산으로 착각하고 있고, 교회와 신자를 매각하고 있으며, 교회를 자식에게 상속하기 위해 별의별 편법 행위를 일삼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도 왼 손이 한 일을 오른 손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듯한 태도를 취할 것이 아니라, 이제 자신의 왼 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똑바로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미 우리는 기독교가 운영하는 신문사와 기업, 기독교를 대표하는 정당, 심지어는 기독교를 위해서 일하는 무수한 정치인,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무릎 꿇고 통성기도를 하는 대통령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보이는 선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선교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한국사회에서 종교와 정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은밀하게 이종교배를 통한 돌연변이를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글은 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288호 (2012년 4월 3일자)에 게재된 것을 본 뉴스레터 형식에 맞게 재편한 것입니다.



이창익_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changyick@gmail.com


주요 논문으로 〈신화로 그리는 마음의 지도〉(2011),〈종교와 미디어 테크놀로지: 마음의 물질적 조건에 관한 시론〉(2011) 등이 있고, 공저로 《불확실한 세상》(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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