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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199호-선교와 식민정책(안교성)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2. 3. 28. 18:03

선교와 식민정책

2012.2.28


* 이글은 한종연 2월 월례포럼에서 발표한 김명윤의 “선교와 국가정책의 관계에 대한 연구” 의 논평을 재정리한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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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학계에서는 서구개신교선교의 확장과 서구제국주의의 확장이 궤를 같이함에 따라, 과연 선교와 제국주의의 관계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연구해왔다. 본 논문은 선교와 제국주의의 관계 가운데, 구체적으로 인도[인디아]에서의 선교와 식민정책의 변화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주로 제국주의 혹은 식민주의에 대하여 선교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를 다뤘다. 이에 따라 가령 선교가 식민주의의 앞잡이였다 혹은 적어도 식민주의가 제공하는 기회에 편승하였다는 식의 비판이 나왔다. 이에 비하여, 본 논문은 양자의 관계에서 선교가 제국주의 혹은 식민주의에 대하여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묻고 있다. 즉 양자의 관계에서 있어서 선교의 능동적인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본 논문은 구체적으로, 영국이 인도를 통치함에 있어서, 회사를 통한 통치에서 직할통치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선교가 미친 영향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특히 이러한 과정의 분수령이 되었던, 1813년 동인도회사 정관개정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물론, 인도가 영국의 직할령이 된 것은 상당한 시기가 흐른 뒤였다. 여하튼 필자가 이런 과정의 분수령이 된 동인도회사 정관개정 사건을 다룬 것은 선교역사 연구에 있어서 매우 의의 있는 연구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선교 특히 당시 영국교회의 복음주의 계열이 동인도회사 정관개정을 추진한 것은 그들의 선교의 목적이 주로 선교 자유와 도덕적 개선-을 이루기 위해서였으며, 이를 위하여 인도의 통치방식의 변화를 강조하였고, 결과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즉 영국의 인도 통치 초기에는 경제적 목적이 중시되었고, 인도의 문화 및 종교를 인정했고, 이런 맥락에서 인도인이 자기 종교를 믿을 수 있는 종교관용이 중요했다. 그러나 점차 문명화의 사명이 중시되었고, 인도의 문화 및 종교를 상대적으로 비하하게 되었고,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의 선교를 자유롭게 전개할 종교관용이 중요했다. 따라서 이런 변화를 동인도회사 정책에 반영하기 위하여 정관개정에 나섰던 것이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그의 핵심적인 질문인, ‘선교가 어떻게 제국주의/식민주의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세분하지 않지만, 이 질문은 결국 다음과 같은 하위질문으로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식민정책의 변화에 있어서 선교[혹은 선교 지원 세력]의 역할은 무엇인가? 둘째, 이처럼 변화된 식민정책은 거꾸로 선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셋째, 그 결과 선교는 어떤 선교관을 형성하게 되었는가? 두 번째 질문과 세 번째 질문이 보다 상세하게 전개되었다면, 보다 종합적인 이해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적어도 19세기의 경우만 해도-1813년부터 한국에 개신교가 전래된 19세기말까지-, 영국의 인도 통치 방식과 정책, 영국 정부 및 인도 식민정부와 선교의 관계, 그리고 선교정책 등이 많은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1813년의 동인도회사 정관개정 사건에 대한 설명만으로는 인도 상황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필자는 논문의 후반부에서 1813년을 중심으로 한 전환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선교관이 한국교회의 선교에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그 선교관이 무엇인지, 그것이 한국교회의 선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하여 상술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필자는 이런 맥락에서 토착교회론을 간략히 언급하는데, 과연 토착교회론이 1813년 사건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인도 상황에서 토착교회론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그리고 인도에서 전개된 토착교회론이 한국선교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등을 밝힐 수 있다면 매우 유익한 연구가 될 것이다.

1. 필자가 다룬 선교와 식민정책의 변화의 문제는 비단 인도 뿐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가령, 선교가 다양한 이유로 선교지가 영국에 합병(annexation)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한 경우가 있다. 따라서 당시 상황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비교 연구를 위하여, 브라이언 스탠리(Brian Stanley)의 <<성경과 국기(The Bible and the Flag: Protestant missions & British imperialism in the nineteenth & twentieth centuries>> 가운데 해당 부분을 소개하면 좋을 듯하다.

2. 선교와 국가의 관계는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가령 프랑스는 프랑스혁명 이후 국내적으로는 줄곧 국가와 종교의 분리, 특히 국가의 세속성(laicity)를 강조하였지만, 국외적으로는 선교와 식민정책을 밀접하게 전개하였다. 이런 프랑스의 복합적인 혹은 자기모순적인 종교정책은 한국의 개국을 전후한 프랑스 선교사와 한국 가톨릭교회의 관계, 특히 한불조약 체결 과정 등에 영향을 미친 바 있다. 따라서 이러한 선교와 국가의 관계의 다양성도 아울러 고찰되었으면 한다.

3. 선교 정책에서도 기독교화와 문명화 내지 서구화를 동일시하는 입장과 별개시하는 입장이 있다는 것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특히 선교의 교육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가령 토착교회론 주창자 가운데 하나였던 헨리 벤이 인도에서 관심을 가진 것은 주로 교육문제 특히 기독교를 소개하는 교육이었다.

본 논문은 뿐만 아니라, 선교와 식민정책의 관계를 다루면서, 선교를 세분하여 다루고 있다. 즉 국교도, 국교도 내의 복음주의 그룹, 비국교도 등을 언급하는데, 이런 각 하위 그룹의 역할과 하위 그룹 상호간의 관계를 보다 명확하게 기술되었다면, 당시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전반적으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그룹은 국교도 복음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아쉬운 것은 선교의 제국주의 비판 문제이다. 물론 이 주제는 본 논문의 직접적인 관심이 아니고, 또한 당시 서구제국주의 국가와 서구선교가 전반적으로 착안하지 못한 문제이다. 그러나 선교가 선교지의 종교문화적인 측면의 악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면서도, 선교지를 식민지로 삼은 정치적인 측면의 더 큰 악을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못한 것은, 결국 선교와 제국주의의 관계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든 언급이 있었으면 더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한다.


안교성_

장로회신학대학교


kyosahn@hanmail.net


논문으로 <에큐메니칼 교회로서의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정체성과 증언>,<한국기독교 에큐메니칼 운동과 대한기독교서회

>,<한국전쟁과 기독교의 수난>등이 있고, 역서로 <<영국선교회 선교사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신앙과 풍속>>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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