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한국불교의 자주화운동을 다시 생각해 본다

2011.4.19


지난 12월 초 경북 문경의 대승사와 김룡사를 참배한 적이 있다. 고향에서 가까운 곳이라 고향을 갈 기회가 있으면 가끔 참배하러 가곤 한다. 고찰을 참배한다는 것은 종교적 의미 이외에도 여정의 여유로움과 산사의 풍광, 그리고 나의 과거를 만나는 설레임이 있다. 오랜만에 방문한 두 사찰은 큰 불사를 하고 있는 중이라 사찰 분위기가 아주 어수선했다. 퇴락한 사찰을 보수하는 것이 아니라 템플스테이회관을 짓고 있어서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내 고향 문경 인근은 인구가 점차 줄어드는 곳이다. 젊은 사람들은 대다수 도시로 진출하고 노인인구 비율이 점증하고 있다. 현재의 지역상황으로는 사찰유지 조차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지역 스님들의 걱정 중 하나였다. 그런데도 두 사찰 모두 큼직한 회관을 짓고 있어서 보기는 좋았지만 앞으로 노승들만 남을 것인데 사찰 관리를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연말이 되자 템플스테이 예산 문제로 인해 대한불교조계종(이하 조계종)은 국민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문제의 핵심은 정부가 조계종단에게 지원하기로 약속했던 템플스테이 예산을 당초 약속과 달리 대폭 삭감하자 불교계가 발끈한 것이다. 그리고는 정부가 한국의 전통문화를 무시하는 처사라는 것이다. 또한 그에 대한 항의로 정부가 주는 템플스테이 예산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뿐 아니라 불교계의 행사에 정치인의 출입을 금지시키기로 결의하는 한편, 어떠한 형태의 정부지원도 거절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예견이나 한 것처럼 급속하게 처리되었다. 또 이를 계기로 엠비정부의 종교편향의 문제와 4대강사업의 부당성을 강하게 제기한 것이다.

종단이 이런 불평등과 부당성을 제기한 것은 당연히 해야할 일이지만 하필이면 꼭 이 때 정부정책의 부당함까지 들고 나와야 했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종단의 이런 조치는 누가 보더라도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뒤틀린 투정처럼 보일 수 있고, 당시 소위 1천억 형님 예산을 확보한 것에 대한 국민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돌려버렸다는 것, 나아가 도리어 정치적으로 이용당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 종단의 지도자들은 권력으로부터 배신당하고도 온갖 욕을 다 먹게 되었으니, 속된 말로 화가 머리끝까지 날만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권력을 찾아다니며 구걸하는 일부 승려들도, 그리고 곧 정부와 화해하게 될 것이라고 발 빠르게 움직이는 승려도 있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전통사찰보존법이라는 법이 있어 당국과 접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당근 맛에 익숙해진 일부 승려들이 그새를 견딜 수가 없었나 보다하고 속웃음을 짓고 넘겼다.

한 때 조계종단은 사부대중의 종단이라기보다 정치적 연줄이 있는 일부 권승들이 지배하는 종단이었다. 시대를 밝히는 횃불이 되기는커녕 부정과 부패, 어용과 호국이라는 장막에 갇혀 있었고, 혼자 일어서기에도 힘든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수경 스님과 명진 스님이 떠 날 때 그랬다. 더 이상 지체한다면 사자충(獅子蟲)에 의해 죽는 사자 꼴이 될 것이라고도 수군거렸다. 한때 권승들을 몰아낸 현재의 개혁종단이 들어서고도 오해가 있을 수 있는 일들이 지속되고 있다. 종단의 대응이 좀 어색하긴 하지만 이번 기회를 계기로 불교가 지난날 폐습을 끊고 불교다운 본연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불교의 자주성을 확립할 계기가 삼았으면 한다.

한국불교가 당근 맛에 취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근원적인 원인이 과거 전통에 타성과 현대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초기 불교시대에는 출가자가 정치인과 각별하게 지내거나 불필요하게 궁정을 출입하는 것을 대단히 경계했다. 옷 세벌과 발우 하나(삼의일발) 이외에 소유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으며, 군왕과 다른 차원에서 정신적 교화의 주체자란 강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즉, 출가공동체와 정치는 각각 가는 길이 다르다고 생각했으며, 오히려 그런 출가자를 공경하고 보호하는 것이 군왕의 책무였다. 정치체제는 유한하다고 보았지만 수행자들이 궁극적 이념으로 생각하는 법(dharma)의 정신은 시공을 초월하는 영원한 준칙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종파를 불문하고 진실하게 수행하는 구루(수행자)들에 대한 사회적 존경은 대단했다.

그러나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인도문화와 달리 황제를 중심으로 충효(忠孝)의 문화를 구축하고 있던 중국인들은 초기 불교에 많은 변화를 요구했다. 중국적 관념에 따라 출가자들도 황제의 지배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남북조시대에 활동한 여산 혜원은 이에 대해 “출가자는 정신적 수행을 통해 백성을 교화한다”는 점에서 왕권이 추구하는 길과 다르며, 그렇기 때문에 불교교단의 독자성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500년 이상에 걸친 양자의 긴 다툼은 당나라 시대가 되면 종식을 고하게 된다. 출가자 스스로가 신하되기를 자처했기 때문이다. 황제 아래 불교는 완전히 중국문화에 동화되어 왕권의 지배와 보호를 받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새장에 갇힌 새가 날 수 없고, 먹이를 찾을 수 없듯이 어느 덧 그러한 일들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타성화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은 당시의 문화적 한계였다.

그러나 근대성을 기반으로 형성된 세속적인 근대국가가 형성되면서 정교의 관계에 새로운 설정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불교 역시 교권의 독자성을 다시 인식하게 된다. 근대 국가에서는 특정한 종교가 정부의 그늘에서 기생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천 몇 백 년의 타성을 걷어내기에는 여전히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불교에 중국화된 선불교의 고착화는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현재 여러 문제점들을 노정하고 있다. 이제 시대가 변했다. 조계종단은 중국불교의 한계를 타파하고 불교 본연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템플스테이 지원금이나 문화재보수비로 인해 발생하는 몇 푼의 낙전 때문에 불교의 자존심을 팔 때가 아니다. 오히려 사자충과 같은 것이다. 보다 시급한 것은 종단의 정체성과 자주성을 어떻게 확립하고 보존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간 경위야 어떠하던 간에 현재의 조계종단, 아니 한국불교계는 이런 면에서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재검토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은 것이다.

그렇다고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무조건 갈등만을 야기하는 것이 불교의 자주성이라고 하는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신앙대중을 위한다는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협조할 것은 협조하되 그것이 불교적 가치와 배치되는 것은 아닌지, 혹은 불교적 가치를 구현하는 방법인지를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반불교적이라면 세속적 권력과 금전적 이익에도 굴하지 않고 과감하게 거절할 수 있는 종단 지도자들의 용기와 종단의 결사 분위기를 살려나가야 하는 것이다. 기회는 스스로 찾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격언이 있다. 한국불교에서 민족문화 수호운동도 좋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과제는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과 권력에 기대지 않고 신앙대중을 나서게 하는 자주화운동이다.

차차석_

동방대학원대학교 svhaha@hanmail.net


최근논문으로 <震默 一玉의 선사상과 그 연원 고찰>,<攝山系 三論師의 定慧雙修說과 天台師의 敎觀兼修說

比> 등이 있고, 저서로 《중국의 불교문화》,《불교와 국가권력》,《다시읽는 법화경》,<<불교와수행>>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