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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종교사회학'을 지향하며

2011.4.5


임종을 앞둔 어느 날 우연히 선친께서 한 이야기 한 토막이다. “어릴 때는 서당에 나가 한문과 중국역사를 달달 외우고, 조금 나이가 들어서는 일본어와 일본역사를 공부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헤겔 철학이나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고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자 영어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니, 정작 우리의 역사나 우리의 사상에 대해서는 공부할 기회를 다 놓쳐 버리고 벌써 죽을 때가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현재 나의 삶과는 무관한, 선친의 과거에 대한 회한쯤으로 지나치고 말았다. 한 참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리고 선친의 삶이 나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깨달은 뒤에야, 나의 아둔한 머리는 그 이야기를 꺼낸 선친의 참 뜻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당시 나의 관심은 노동문제의 범주를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학위논문의 주제가 그 범주 안에서 정해졌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거의 10 년 가까운 세월을 송두리째 투자하고 겨우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왠지 모를 회의가 밀려왔다. 과연 내가 연구한 것들이 진정 우리 삶의 생생한 이야기인가? 혹시 내가 한 작업이 우리의 현실을 기존 사회학 이론의 패러다임에 부합하도록 끼워 맞춘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나는 “누구를 위하여 그리고 무엇 때문에” 나의 젊은 날을 송두리째 소진했던가? 학위논문을 마치고 마음고생이 매우 심했다. 이런 가운데서 불현듯 선친의 유훈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순간, 그 이야기가 당신의 새삼스런 회한이 아니라 자식들의 삶에 대한 우려와 조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나는 학위논문의 최종 마무리 작업 때까지만 하더라도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유학길에 오르려고 별렀다. 그러나 다시 떠오른 아버님의 유훈 앞에 맥없이 해체되었고, 또한 그 길에는 아무런 미련도 가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시 우리의 역사와 사상을 공부해보자. 적어도 한국인의 현재 삶과 한국적 종교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한국적인 사회학 또는 동양종교 사회학을 지향해보자. 나아가 서구 기독교적인 교구사회학의 번역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전통과 문화가 담긴 종교사회학을 만들어보자. 그리고 내가 사회학을 하고 있는 이상 유교이든 불교이든 노장사상이든 사상 그 자체를 관념적으로만 접근하지는 말자. 이러한 단서를 달았던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이유는 나 자신이 우리사회의 그 누구 못지않게 유교사상 및 그에 기초한 유교문화와 운명적으로 얽혀 있다는 점이다. 우리사회의 압축적 산업화 앞에서 너무나 무력하게 해체되어 가는 유교문화의 끝자락에 매달려 살아가는 한 인간을 상상해 보라. 이런 현실에 관심을 갖거나 혹은 최소한 해결의 복안을 갖고 있지 못하면서 유교사상과 유교문화를 관념적으로만 연구하는 것이 결코 나의 양심이 허락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맑시즘의 영향이다. 사회갈등 및 변동의 측면과 관련하여 객관적 조건이란 요인과 행위주체이란 요인을 동시에 고려하는 이론으로서의 맑시즘을 나는 부정할 수 없다. 특히, 나는 마르크스가 독일이데올로기의 포이에르바하 테제에서 익사사건에 대한 관념론적 설명과 유물론적 설명을 비교함으로써 관념론의 허구를 뒤집고 살아있는 실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다시 뒤집을 만한 논리를 갖고 있지 못했다. 세 번째 이유는 사회학의 영향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사회에서는 동양사상이나 동양문화를 주로, 역사학, 동양철학, 그리고 종교학 등의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동양사상과 동양문화를 사회적 맥락이나 그 담지자와 연관시켜 재해석함으로써 이 분야에 대한 기존의 연구 성과와는 다른 ‘사회학적 색깔이 있는 연구 성과’가 새롭게 탄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한국사회를 연구하는 사회학자라면 한국인의 사회관계와 사회적 행위를 좌우하는 세계관(가치관이나 신념을 포함)에 대한 이해는 물론 그러한 세계관이 사회관계 및 사회구조의 형성 및 변화와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충분히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한국불교가 오늘날 지금 현재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최소한 전체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한국인의 가치관이나 신념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나는 한국불교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가 전무한 한국 사회학계의 현주소에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다. 이러한 현실은 선친의 유훈을 차가운 자기 확신으로 굳어지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금일 불교사회학이라는 제목으로 책이 출판되었지만 그와 관련한 선행 연구가 거의 없는 상황인지라 목차를 정하고 각 장과 관련하여 한편씩 논문을 완성하기로 작정했다.

가장 먼저 불교사회학의 학문적 성격을 나름대로 확정짓는 작업이 요구되었다. 연구대상을 확정짓고 연구방법론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를 시도해 보았다. 그것으로 제1부를 구성하였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순탄한 길이었다. 다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거대한 산맥이 앞을 가로막았다. 동양사회를 연구한 베버와 벨라였다. 전략적으로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베버의 대승불교 해석만을 문제삼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전략으로 내친김에 벨라라는 산봉우리까지 간신히 정복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나는 아직까지 이들에 비견될 만큼 불교를 사회학적으로 다룬 연구성과를 찾지 못했다. 해서 베버와 벨라의 불교사회학이라는 제목으로 제2부를 마무리하였다. 이같이 베버의 관점을 검토했으면 다음 수순으로 당연히 맑스와 맑스주의적 관점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회학자의 관습이다. 그리고 이미 나는 맑스 공부를 조금은 해 둔 상태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불교와 맑스를 비교사회론적 관점에서 논의하기도 하였고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불교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동아시아 참여불교 실천가의 사회운동을 학문적으로 재구성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제3부에 배치하였다. 제3부를 마무리하면서, 나는 불교사회학이 더 심화되기 위해서는 불교와 사회의 관계는 물론 그 각각이 상호의 영향아래 무상하게 변화하는 현실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적 패러다임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베버의 관점이나 맑스의 관점이 종교(불교)와 사회 사이의 상호변용의 관계 중 부분적인 측면만 설명할 뿐만 아니라 독립변수와 종속변수를 실체화한 다음 단일한 인과관계의 논리를 적용하는 서구 근대학문의 본질적인 한계를 공통적으로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불교사회학을 심화시키기 위한 새로운 모색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길은 결코 손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존의 종교사회학적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일이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서 화엄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화엄철학에 관심을 기울인지 2년이 넘어서는 어느 날 불현듯 ‘상즉상입의 불교사회학’이란 착상이 떠올랐다. 즉각 ‘상즉상입의 불교사회학’이라는 ‘다소 엉뚱한 그러나 전혀 새로운’ 종교사회학적 패러다임을 정립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겨우 마무리하였다. 그러고 나니, 중도와 ‘또 다른 진보’의 상즉상입 등 그와 관련된 글들이 이어졌다. 그것을 묶어 제4부를 구성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여하튼 4부까지 마무리하자 불교사회학의 개론서 형태가 갖추어졌다. 그러나 책의 출판을 상당히 머뭇거렸다. 한국사회에서 사회학 훈련을 받은 사회학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워낙 생소한 성격의 책이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용은 보잘것없지만 필자에게는 동아시아 종교사화학을 출발하는데 대단히 귀한 책일 수 있다. 선친의 유훈과, 한국인의 삶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해보려는 열망, 동양종교의 삶을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 등이 어우러진 것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불교사회학 -불교와 사회의 연기법적 접근을 위하여-』(유승무 저, 박종철출판사, 2010)를 소개한 글이다.

유승무_

중앙승가대학교 smlew691@hanmail.net


최근 논문으로 <참여불교의 관점에서 바라본 갈등시대 한국불교의 사회참여>, <불교와 마르크시즘의 동몽이상>,<한국

불교 노동관의 탈현대적 함의>등이 있고, 주요저서로 <<한국 전통사회의 의사소통체계와 마을문화>>,<<시민사회와 종

교사회복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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