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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129호-다시 우주의 중심에 선 인간(박상준)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1. 4. 26. 16:20

다시 우주의 중심에 선 인간

- 스티븐 호킹,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의 《위대한 설계》에 대한 서평

2010.10.26


스티븐 호킹과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의 책 《위대한 설계The Grand Design》가 2010년 10월에 한국에서 출간되었다. 미국에서는 《위대한 설계》가 출간되자마자 아마존 종합 1위에 올랐으며, 호킹이 미국의 한 방송에서 ‘신’과 관련된 얘기를 하면서 책이 크게 주목을 받았다. 저자들이 《위대한 설계》에서 주장한 것은 ‘신이 없어도 자연법칙만으로도 우주가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방송 이후 이 표현은 ‘신은 없다’는 의미로 전달되어 논란이 되었다. 이러한 지적은 저명한 과학학술지인 《네이처》에 실린 서평에서도 볼 수 있다. (Michael Turner, "Cosmology: No miracle in the multiverse," Nature 467 (07 October 2010), 657-658.)

<<저자들은 이 책에서 우주에 관한 가장 깊숙한 질문을 제기한다. ‘왜 무無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있을까? 왜 우리가 있을까? 왜 다른 법칙들이 아니라 이 특정한 법칙이 있을까?’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질문, 질문의 거대함에 압도되어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관찰하는 계기가 되었을 질문, 그러다가 별다른 답을 얻지 못한 채 저쪽 구석에 치워두었을 질문. 그 질문이 이 책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제 독자들은 궁금하다. 정말로 이 깊숙한 질문에 답이 있다는 걸까? 이 두 사람이 답을 알고 있기는 할까?

호킹과 믈로디노프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M이론(M-theory)을 내놓는다. 거칠게 표현하면, M이론은 “우주에 관한 궁극의 이론, 모든 힘들을 아우르고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예측하는 이론의 속성을 모두 갖춘 유일한 모형”이다.(12-13쪽) 즉, M이론은 물리학에서 다루는 모든 대상, 예를 들어 물질의 최소 단위부터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하는 (현재까지) 유일한 모형이다. 여기서 M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론을 명명한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도 불명확하다. ‘master, miracle, mirage’이라는 단어가 언급되기는 하지만 합의된 정의는 아직 없다.

저자들은 책의 초반에 M이론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론으로 모형 의존적 실재론(model-dependent realism)을 제시한다. 모형 의존적 실재론은 “우리의 뇌가 우리의 감각기관들에서 온 입력을 해석한다는 생각에 토대를 두고서(12쪽), 그림이나 이론에 의존하지 않는 실재의 개념은 없다”(54쪽)는 방법론이다. 즉, 우리의 인식과 아무 관계없이 저 밖에 존재하는 실재는 없다는 것이다(여기서 언뜻 불교의 유심론이 떠오르기도 한다). 관찰자와 관찰하는 대상이 결합되어 있다는 이 주장은 엄밀 과학의 대표인 물리학에서 나올 수 없을 것 같지만, 이는 양자역학의 핵심을 이루는 전제다. 내가 관찰을 통해 미시세계의 물리적 특성이 결정되며 관찰하는 방법을 바꾸면 그 특성도 바뀐다. 알듯 말듯 애매한 이 전제가 양자역학의 핵심이어서, ‘양자역학을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리처드 파인만의 입에서 나오기도 했다.

모형 의존적 실재론을 방법론으로 삼은 M이론이 내놓는 결론은 하나의 우주(universe)가 아니라 다수의 우주(multiverse)다. 10^500개 정도의 우주가 가능하기 때문에 생명이 있는 우주도 존재할 수 있으며, 인간이 우주의 기원을 고민하고 있는 이 지구도 존재할 수 있다. 즉, 신의 창조 또는 미국에서 최근 큰 논란이 되었던 변형된 창조론인 지적설계(intelligent design)가 없더라도, 자연법칙만으로도 우주가 자발적으로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이 저자들의 결론이다. 또한 모형 의존적 실재론에 따르면 관찰자와 관찰 대상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우주도 인간의 관찰에 의해 새롭게 결정된다. 실로 엄청난 실재론이다. 우리의 관찰에 의해 우주가 결정된다니! 처음에는 이 실재론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의심이 들겠지만 양자역학은 지난 수 십 년 동안의 검증을 견뎌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의해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의해 인간은 우주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19세기까지만 해도 우주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은 너무나 작고 하찮은 존재였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양자역학의 발전과 우주 창조를 다룬 물리학 연구 결과 덕분에 인간은 다시 우주의 중심에 섰다. 인간에 의해 우주의 과거 역사와 미래 역사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위대한 설계》가 우리에게 던져준 메시지다.


박상준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회원 cygnus30@hanmail.net


역서로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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