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한국사회의 유불 교섭
2009.12.1
역사적으로 유교는 인간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길 위에 펼쳐져 있고, 불교는 이 세상을 가로질러 자유를 실현하고 무량광의 빛으로 향하는 길 위에 있다. 길을 가다보면 우리는 모퉁이에서 만나고 교차로에서 만난다. 유교와 불교의 교섭은 교차로에서 만나는 소통이다.
소통에는 상호 이해를 위한 만남이 있고, 한 쪽에서 다른 쪽을 저울질 하고 평가하는 통변의 만남이 있다. 역사적으로 고려의 선비 이제현은 유교의 길에서 불교를 번역하였고, 조선의 함허득통은 불교에서 유교를 통변하였다. 그들은 서로 다른 종교사유를 바라보면서 자신이 믿는 신앙의 언어로 상대를 열심히 번역하려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통변의 만남은 회통을 보여 주지만 번역에 머물고, 변증법적으로 상대를 이겨보려는 승부사의 근성을 드러낸다.
이처럼 변증법적 대화는 자기를 붙드는 대화이며, ‘대화를 위한 대화’는 자기마저 상대에게 자신을 내어 놓는 대화이다. 종교 간의 대화를 주장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자신이 믿는 전통으로 돌아가기 위한 대화를 전제한다. 진정한 대화는 대화 도중에 자신이 바뀌게 됨을 감내하게 된다. 서로 다른 길에서 만나서 큰 ‘한’ 길로 접어든다. 이 길에서 통달로 교감하거나 횡단매개하는 매개체로 작용하면서 차이로 느끼던 경계가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큰 ‘한’ 길에서 최치원은 ‘한’의 풍류도를 주장하였다. 차를 통하여 ‘다선일미(茶禪一味)’로 통달의 새 길을 초의선사에게서 볼 수 있다. 어느 경우든 자기 고집은 놓아버리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길에 사무치다 보면 새 길이 발견되고 경계를 무너진다.
우리가 사는 지구촌은 이념 갈등이나 종교 갈등으로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이 많이 늘어난다. 이제 신라의 최치원에게서 ‘한’을, 고려의 이제현에게서 ‘회통’을, 조선의 함허득통에게서 ‘현증’을, 그리고 초의선사에게서 횡단매개의 상통을 배울 필요가 있다. 이는 변증법적 주장이 아니라 ‘놓음’이며, 언어의 특수맥락을 ‘살려냄’이다. 유불 교섭의 길은 개신(開新)의 새 길을 보여준다.
이제 종교 간에 통달하는 새 길이나 횡단매개의 가교의 길을 마련하여야 한다. 이는 생명살림의 사회운동이다. 소통으로 심연이 열리면서 서로는 다가서게 된다. 첨단과학기술의 영상매개 시대를 맞아 대화도 개선해야 한다.
생태위기, 인권유린, 남북갈등의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면 대화와 협력이 주요하다. 개벽의 시기에는 종교마다 상대방을 향한 새 창구를 열고 맞이할 준비가 필요하다. 교류와 소통은 현대인에게 주요한 삶의 화두가 되어 가고 있다.
김용환_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교수 sunyanan@cbu.ac.kr
주요 저서로 <<만다라-깨달음의 영성세계>>,<<현대사회와 윤리담론>>, <<종교윤리와 정산사상>> 등이있다.
'뉴스 레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84호-한국 개신교는 어떠한가?(류성민) (0) | 2011.04.15 |
---|---|
83호-게르만 땅에도 법열(法悅)의 바람이(김명희) (0) | 2011.04.15 |
81호-2009년 하반기 심포지엄 후기: 생각하고 행동하는 씨알의 소리(이찬수) (0) | 2011.04.15 |
80호-지령 16호를 맞이하여(이욱) (0) | 2011.04.15 |
79호-함석헌의 종교학적 탐구: 이 땅의 새 종교를 찾아서(김영호) (0) | 2011.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