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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하반기 심포지엄 후기


생각하고 행동하는 씨알의 소리

2009.11.24



그동안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함석헌 연구는 주로 기독교권에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기독교적 사상가로 평가하는 것은 도리어 그를 크게 오해하는 행위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동서고금을 넘나들면서 역사를 이끌고 시대를 움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을 억압하는 구조적 폭력을 단호하게 거부하면서도 자신이 강의한 노장 사상을 몸으로 살아낸 자연생태주의자이기도 했다. 그가 ‘씨알’을 강조한 것도 기본적으로 ‘생명', ‘스스로 그러함’(自然)에 대한 경외감을 반영해준다.

그에게 생명은 무생물에서부터 인격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상을 지배하는 원리이다. 그 생명의 원리는 ‘스스로 함’에 있으며, 가진 것이 없기에 잃어버릴 것도 없는 ‘맨사람’ 씨알은 ‘스스로 함’의 표상이다. 그의 민중, 민족 운동 안에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와 동양정신, 종교성과 사회적 실천이 하나로 녹아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함석헌은 예수, 붓다, 노자, 그리고 간디에 다가간, 영원한 재야의 인물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독재와 불의에 저항한 예언자적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삶을 참 넓고 깊게 살아낸 인물이다. 그에게 약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번쯤이라도 그의 삶을 떠올려보는 이에게는 부끄러움이 일어난다. 며칠 전 ‘한종연’ 심포지엄(2009.11.21)에서 신재식이 어떤 사람의 글보다 그에 대한 글이 더 많아지는 순간 그 개인은 ‘신화화’ 단계에 들어가며 함석헌은 신화화의 초입에 서있는 것 같다고 진단하기도 했는데,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인생을 성찰하게 하는 사람을 갖게 된다면 신화화의 단계에 들어선 들 어떠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의 종교’를 심포의 후기로 다시 한 번 정리해 본다. 불자, 기독자 등 종교적 ‘신분’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많아도 참 ‘종교적인’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어떤 때는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깊은 명상에 잠기는 고요한 사람인 듯 하다가도, 어떤 때는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고, 밥 굶기를 걱정하지 않으며, 죽기마저 겁내지 않는 실천적 양심의 소유자를 만나기란 더욱 그럴 것이다. 거기에다가 20세기 한국 지성사의 정점이라는 찬사마저 받는 이가 있으니 바로 함석헌(咸錫憲, 1901-1989)이다.

함석헌은 1919년 자신이 다니던 평양고보를 뛰쳐나와 3.1운동에 참여한 뒤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는 평양고보가 일본에서 운영하는 학교라는 이유로 복교하지 않다가, 2년 후 오산학교에 편입해 남강 이승훈과 다석 유영모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특히 다석 유영모는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오산학교에서의 배움 이후 그는 다석을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다석을 통해 주체적이고 깊이 있는 그리스도교 정신, 생각 하나를 하더라도 깊게 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다석의 사상인 ‘씨알’을 발전시켜 ‘씨알농장\'을 세웠고, 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해(1970-) 서슬퍼런 군부독재 시절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함석헌은 일본 유학 중(1923-28) 만난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에게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예수’와 ‘일본이라는 ‘2J’를 사랑했던 우치무라의 문하로 들어가면서, 형식적 교회주의를 거부하고 신과의 일대일 만남을 추구하는 무교회주의자가 되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과 민족의 관계도 명확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신앙과 애국심은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식민 지배의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 일본식 무교회주의와 억압받는 조선의 민중들 사이에는 괴리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해방을 맞고 6.25 전쟁을 겪으면서는 무교회주의를 포함한 모든 ‘종교’로부터의 탈퇴를 선언하는 글을 쓰게 된다.(1952-53) 그러면서 나름대로는 더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그리스도교 신앙, 근저에서 동양 정신과 만나는 종교성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여자문제’로 세인의 비난이 뜨거워지던 1960년대, 함석헌은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준 퀘이커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영원한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고 신비스런 공동체성을 추구하면서 반전, 평화 운동을 벌이던 퀘이커에서 안식을 찾으며, 동양정신으로 지평을 확대한다. 서구와 동양이 만난 새로운 문명의 질서를 추구하고, 제도 종교의 틀을 벗어난 더 넓고 깊은 진리의 세계로 나아간다. 진정한 혁명은 인간 혁명이라는 신념에 따라 1971년부터 1988년까지 노자(老子) 강의를 계속하면서 그리스도교, 동양의 자연주의 정신, 사회-정치적 혁명의 통일을 추구한다. 그러면서 그 방법은 대체로 간디식의 ‘비폭력투쟁’이었다. 그만큼 함석헌은 간디에게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2차 대전 이후 세계 사상을 이끌어갈 문명은 동양과 서양의 만남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한계에 부딪힌 현대 서양의 문명을 바로 이끌어줄 수 있는 가르침이 동양의 고전 속에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동양의 정신을 해석하되, 권위적이고 절대적이며 귀족적인 해석은 사양하고, 시대적 흐름에 맞게 재해석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교 신앙과의 해후를 추구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기독교적인 것이 좀 더 넓게 좀 더 깊게, 자신의 것으로 가깝게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동양 것을 스스로 읽어보는 데서 시작”했고, “동양에 대한 눈이 넓어지면 질수록 기독교 이해는 뿌리가 조금씩 더 깊어가고 가지가 더 높이 올라갔다.”

물론 동양 사상이 기독교를 이해하게 해주는 보조수단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진리의 궁극성, 개방성, 상통성을 확신하는 가운데, 예수의 도와 노장(老莊) 사상의 도를 연결 짓는 방식으로, 동양 사상 안에서 신적인 진리를 읽어내고자 한 것이다. 김경재는 함석헌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한다.

“함석헌은동서 종교 사상을 한 몸 안에 융섭한 위대한 혼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하고 궁금해 할 온 세계 종교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연구해볼 하나의 진주와 같다. 동양 사상의 핵심적‘알짬’인 간디를 낳은 힌두교의 불살생(不殺生) 비폭력 저항 사상, 원효를 낳은 만법귀일(萬法歸一)의 대승불교 사상, 그리고 노장의 순수 본바탕을 찾아 지키려는 비판적 무위 사상과 유가의 인의(仁義) 천명(天命) 사상 및 한국의 하늘님 신앙 등이 기독교 사상 및 서구 과학정신과 혼연일체가 되어 융합되고 있다.”

함석헌 안에서는 “동과 서가 만나고, 불교와 기독교가 만나고, 종교적 신비주의와 과학적 합리주의가 만난다.” 기독교를 배경으로 활동했던 함석헌도 결국은 이렇게 말한다: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하나다.” “기독교가 결코 유일의 진리도 아니요, 참 사관이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진리가 기독교에서는 기독교식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이찬수_

종교문화연구원장 chansuyi@hanmail.net

주요 논문으로 <自權에서 他權으로 - 그리스도교적 인권론> 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종교의 사람 사람의 종교>>, <<종교로 세계읽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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