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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6호-광복절과 민족종교(이찬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1. 4. 15. 14:39

광복절과 민족종교

2009.8.11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억압은 종교정책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일본헌법(1889년 제정) 제28조에는 “일본신민은 안녕질서를 방해하지 않고 또한 신민의 의무를 위배하지 않는 한 신교의 자유를 갖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은 제국주의 정책에 순응할 경우에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민족종교의 경우, 총독부는 포교규칙에 의해 소위 ‘유사종교’로 취급하였으며, 이에 따라 종교단체로 인정하지 않고 일반 사회단체처럼 치안경찰법과 내무부령으로 규제하였다. 민족종교에 대한 탄압은 극도에 달하였다. 동학은 처음부터 일제를 “개같은 왜적놈”으로 인식하였다. 천도교의 멸왜(滅倭)기도 사건은 이 경전구절에 바탕한 것으로 유명하다. 천도교인들은 일제가 하날님의 조화로 일야간(一夜間)에 소멸된다고 믿고 나라를 위해 온 몸을 바쳐 기도하였다. 대종교인의 빛나는 무장투쟁은 여기서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갱정유도 창교주인 영신당(강대성)은 1944년 가을, 문지방 위에 “일낙서산(日落西山) 닭이 우니 월칠팔 하기년(月七八何其年)고? 칠칠(七七)하니 팔전삼(八前三)이라”는 글을 써 붙였다. 이 글귀를 풀이하면, 닭이 우는 을유년(1945)에 일본이 떨어지는데 음력으로 7월7일(양력으로 8월15일임)이라는 내용이다. 영신당은 그 이듬해 바로 그 날인 양력 8월15일 오전, 제자들을 시켜 미리 만들어 놓았던 태극기를 마당 가운데에 기둥을 세워 놓고 그 끝에 달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중에 말하기를, “이 기를 세운 기둥의 그림자가 발 끝에 오기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정오가 되자 영신당은 “조선독립만세!”를 세 번 부르고 나서 이제 일이 끝났으니 그만 들어가라 하자, 그곳에 모여 있던 제자들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였다. 다음날 주재소에 다녀온 제자들이 일본항복을 고하였다.

수운교 중진간부였던 김찬호는 1941년 9월, 일제가 을유년에 패망한다는 것과 이를 위해 비밀 기도를 알리는 서신을 교인들에게 회람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관련자 28인이 검거되었고, 형이 무거운 자는 1년 4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수감된 교인들은 심한 고문에도 자기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 항거하였다. 이 사건으로 박태영 등 5인이 옥사하였다. 또 중진 간부인 오무호는 1943년 5월, 기도 중에 현기를 보고, 이를 교인들에게 문서로 전파하다가 1년 2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현기의 내용인즉, 수운선생이 전국의 교인을 수운교 도솔천 광장에 집결시켜 법회를 열었는데, 이 때 영친왕을 모시고 총독부에 들어가 총독을 축출하고 수운교현판을 붙이니 일본왕이 항복하더라는 것이다.

광복 64주년을 앞두고 있다.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할 오늘이다. 일제 36년 전부를 말할 수는 없지만, 열성적인 친일파 중에는 지식인들도 많이 가담했다. 지식인들은 현실을 중시하는 계층이다. 지식인의 안목으로 볼 때, 철옹성 같은 일제의 식민통치가 이조 500년처럼 수 백년을 갈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지금도 그리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친일 잔존세력은 없을까?

그러나 일제의 식민통치가 머지않아 종결되리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렇게 일제의 식민통치가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대부분 현실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의와 양심과 신앙을 식민지 현실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제의 총독에 항거하거나, 일제가 주는 부귀영화나 명예를 거부하고 그것을 멀리하며 살았다. 세상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그들 대다수는 평범한 민초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속에는 누구도 빼앗을 수없는 신앙의 불꽃이 활활 타고 있었다.


이찬구_

한국민족종교협의회 기획위원 lee2918@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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