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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종교 강연회를 마치고
2009.8.18
첫 번째 강연의 주제는 창조과학이었다. 우려했던, 아니 기대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창조과학은 지난 20여 년 간 한국 개신교계 전반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고, 특히 지난 5월에는 중고등학교 과학교과에서 창조론이 배제되는 것을 문제 삼는 헌법소원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기에, 창조과학을 각기 상이한 시각에서, 그러나 한목소리로 비판하는 우리에게 (사이비 과학이라고 비판하는 무신론 과학자, 사이비 기독교라고 비판하는 진화론적 개신교 신학자, 공공 영역의 붕괴라고 비판하는 종교학자) 창조과학 진영의 반론이 들어올 것이고, 그러면 무언가 생산적인 토론이 이루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강연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창조과학을 비판하는 과학도와 과학 독자들, 그리고 창조과학에 염증이 난 개신교 목회자와 신학도와 신자들이 주요 청중이었다. 사실 애초에 창조과학 진영과의 토론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학의 원칙, 신학의 토대, 법과 교육의 공공성이라는 다소 메타적 차원의 논의를 펼친 반면, 창조과학 진영은 그 동안 창조의 과학적 증거를 확보하는 직접적 차원의 문제에만 주로 관심을 기울여왔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가 잘못된 과학적 지식을 신앙과 부적절하게 융합한다고 해서, 그 종교 자체를 비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런 융합이 과연 적절한지, 또 그런 특정한 융합체가 어느 한 종교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현실은 분명 메타적이고 비판적인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다. 문제는 창조과학이 아니라, 창조과학을 절대시하면서 스스로를 현대사회의 게토로 축소시키고 있는 한국 개신교계의 현실이다. 비록 첫 번째 강연에서 창조과학 진영과의 토론은 무산되었지만, 창조과학의 지배로 인한 개신교의 게토화를 염려하는 개신교인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은 기억에 남는다.
두 번째 강연 주제는 한국종교의 위기였다. 보는 입장에 따라 한국종교는 위기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적어도 통계 수치로만 본다면 지난 10년 새 스스로 종교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의 수는 늘기는커녕 오히려 줄어들었다. 또 종교별로 보면 불교와 천주교의 신자수는 매우 크게 늘었고 (특히 천주교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역술인과 무속인은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에서 갈수록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고 있으며, 종교와 종교 아닌 것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는 새로운 형태의 영적 추구들도 더욱 늘어가는 추세다. 이와 달리 유교, 신종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신교는 말 그대로 위기라면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 양적 지표로나 체감 상으로 명백히 확인된다. 유교는 10여 년 전 종교화 선언을 하기는 했지만 양성평등주의를 비롯한 새로운 시대적 가치를 충분히 따라잡지 못하고 있고, 신종교들은 군종 제도에까지 참여하게 된 원불교를 제외하면 대부분 그 주변성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데, 이는 어찌 보면 불교, 천주교, 개신교의 이른바 3대 거대종교 위주로 짜인 한국종교의 지형이 더욱 공고해지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런데 거대종교의 위상을 점유하고 있는 세 종교 중에서 불교나 천주교에 비해 유독 개신교에서만 위기 담론이 넘쳐난다. 양적으로나 사회적 공신력 면에서 개신교는 그야말로 또 다른 종교개혁의 필요가 운위될 정도로 절박한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한국종교는 혹시 위기가 아닐는지 몰라도, 한국개신교는 확실히 위기다! 이런 등등의 문제를 다룬 두 번째 강연의 주요 청중은 대개 이런 위기의식을 공유하는 개신교인들이었고, 그들의 목소리와 눈빛에는 개신교의 위기를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진지한 고민이 담겨 있었다.
세 번째 화제는 이른바 리처드 도킨스로 대변되는 무신론의 도전이었다. 2년 전 간행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은 지금까지 한국사회 전반은 물론 종교계, 특히 개신교계에서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왔다. 세계에서 한국만큼 이 책에 열광하고, 또 이 책이 던진 화두를 붙잡고 개신교 같은 특정 종교인들이 그토록 치열하게 고민을 한 그런 나라도 드물 것이다. 그만큼 도킨스의 유행은 지독히도 한국적인, 한국 종교문화적인, 한국 개신교적인 현상이다.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날 강연의 청중들 중 절반은 도킨스의 도전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려는 개신교인들이었는데, 뜻밖에도 나머지 절반은 본래적인 또는 탈-개신교적인 무종교인, 불가지론자, 무신론자들이었다. 소수자로서 무신론자들의 대대적인 커밍아웃과 연대화가 필요하다는 (우리 책의 공저자 중 한 명인) 무신론 과학자 강사와 이에 박수치는 청중들의 모습은 마치 무신론 부흥회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비록 유신론의 뿌리가 깊은 서양의 무신론 운동과 달리, 다양하고 이질적인 종교들이 뒤섞인 한국사회에서는 서양식 무신론과는 무언가 다른 무종교, 비종교, 합리주의 운동 같은 것이 더 절실하다는 방향으로 논의가 흐르면서 무신론 운동에 대한 기대가 주춤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강연장은 무신론자들을 위시한 무종교 그룹이 마치 당장이라도 계몽적 미션과 액션을 취하러 나설듯한 열기로 가득했다. 그 진지한 눈빛과 열띤 감수성은 그 어떤 종교인들의 그것 못지않게 진지하고 뜨거웠던 것 같다. 종교적 다양성에 대한 인식과 논의는 종교의 종류를 넘어 종교의 유무와 종교에 대한 호오를 아울려야 할 것임을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세 번의 강연을 통해 강연장을 가장 많이 찾고 우리의 말에 가장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준 이들은 바로 새로운 변화를 꿈꾸는 많은 젊은 개신교인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개신교는 아직은 희망 없는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현대사회에서 자기 종교의 위상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개선해갈 당면 과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려 하는 이들이 있는 한, 개신교에는 분명 미래가 있다. 그래서일까? 정부의 종교편향을 파워 게임으로 전환시키려 하는 불교계나 영성주의를 강화하면서 그 사회적 실천의 무게를 가볍게 하려는 천주교계는 언젠가 지금 여기서 이토록 치열하게 고민하는 개신교인들에게, 역사적 연륜에서나 문화적 영향에서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개신교인들에게 오히려 한 수 배워야 할 때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은...
김윤성_
본 연구소 연구위원,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조교수
jssance@paran.com
최근 저서로 <<종교전쟁:종교에 미래는 있는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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