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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슬픈 자화상: 성공신화의 마법
2008.12.16
올 9월에 치른 기독교대한감리회의 감독회장 선거문제는 나로 하여금 새삼 여러 번 생각하게 만든 기이한 현상이다. 뻔히 파국으로 치달을 것임을 알았을 것인데, 그토록 어이없는 길을 왜 선택했는가 하는 궁금증을 일으켰다.
사태의 발단은 이렇다. 감리교회는 교단법으로 “교회 재판법이나 사회 재판법에 의하여 처벌받은 사실이 없는 이”로 피선거권을 제한하고 있다. 그 법에 따라 감독회장 후보 자격이 없는 김국도 목사가 우연곡절 끝에 후보 등록을 하고 압도적인 지지로 감독회장에 당선된다. 그 사이에 일부 후보자들은 법원에 ‘후보등록효력가처분신청’을 제기하여 서울중앙지법으로부터 김국도 목사에 대한 후보등록효력정지가처분 결정을 받아냈다. 또한 당시 감독회장인 신경하 목사는 선거관리위원장의 독단적인 태도를 비판하는 한편, 공문을 통해 김국도 목사의 자격 정지를 선거권자들에게 발송하기도 했지만, 임시총회에서 김국도 목사가 감독회장으로 선임 공포되기에 이른다.
이런 과정을 통해 김선도(광림교회), 김홍도(금란교회), 김국도(임마누엘교회)로 이어지는 한국감리교회사에 참으로 드문 ‘친족 체제’의 정통이 형성되는 듯했다. 그러나 서울동부지방법원은 김국도 목사에게 감독회장 피선거권이 없고, 감독회장 직함을 쓸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감리교회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고 있다. 흥미진진한 일은 선거 이전에 이미 김국도 목사는 서울중앙지법에서 “후보등록효력정지가처분” 결정을 받은 상태였고, 신경하 감독회장은 선거권자들에게 김국도 목사의 자격정지를 공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가 치러졌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김국도 목사는 다른 후보자들을 압도적인 표차로 따돌리고 감독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정말로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 벌어진 셈이다.
법원의 결정도 불구하고 김국도 목사를 후보로 인정한 선거관리위원장과 총회에서 김국도 목사에게 표를 던진 수많은 목회자들과 장로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까? 더군다나 김국도 목사는 당선 소감의 설교를 통해 감독회장으로 출마한 것이 “십자자의 길이요 고난의 길이요 희생의 길”임을 알고 선택했다고 밝혔다.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인간을 구원한 예수의 사랑을 빗대어 자신의 출마 이유를 말하는 그의 정신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교단법과 사회법을 무시하면서까지 감독회장 후보로 나서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 필연코 당선해서 감리교회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는 그 극진한 희생정신에 경의라도 표해야 하는 것일까?
감리교회 내부의 권력 다툼이나 교단의 내부 분열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재건파와 복흥파”의 분열, “성화, 호헌, 정동파”의 분열, “법통과 갱신”의 분열 등 계파들 간의 권력 다툼이 과거에도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감리교회는 어느 정도 서로 용인할 수 있는 수준에서 분열을 봉합하는 여유를 지녔다는 점에서 작금의 감리교 선거에서 나타난 분열상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오늘날에 한국 감리교회에서 타협과 대화의 방식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가능한 많은 (인적, 재정적) 물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겠다는 승자독식의 반인간적 행태만이 존재할 뿐이다.
나는 감리교회가 보여주는 이러한 현상은 교회성장주의의 마법에 취해 달려온 개신교회의 필연적인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목회자를 개별 교회에서 초빙하는 장로교회와는 달리 감리교회에는 파송제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다. 파송제에 따르면 한 목회자에 의한 교회의 사유화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언제나 교단의 명령에 따라 다른 교회나 선교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몰라도 한국 감리교회는 실질적으로 장로교와 같은 청빙제를 따름으로써 교회성장의 신화를 엮어가는 중요한 주역이 되었다. 개신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대형교회와 그 주역은 많은 목회자들에게서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교회성장학’은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실용적인 신학으로 인식되었다. 교회성장을 위해서라면 그 과정과 수단, 그리고 그 성장의 내용이 무엇이라도 상관이 없는 ‘신학적 진공 상태’가 돼버린 것이다. 또한 목회자의 능력과 교회성장을 등치시키는 반신학적 인지 구조 속에서 교인들은 목회자의 비윤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요소를 발견할 사유의 능력을 상실해버렸다. 그래서 목회자가 교회를 자식에게 물려주면서, 그것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혈통에 따른 제사장직 승계로서 가장 성서적인 일이라는 말을 해도 그냥 순순히 동의할 뿐이다. 적지 않은 개신교 평신도들 역시 목회자의 탁월한 지도력 덕분에 성공신화에 깊이 매료되어 비판적 능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작금의 선거를 둘러싼 감리교회의 문제는 인간의 양심이 어디까지 종교적으로 덧칠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개신교 신학에 기초한 금욕적이고 윤리적인 삶이 자본주의를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교회성장을 부르짖는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적 에토스가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을 지배하고 있다. 이 신학적 패러다임에서 양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양심은 성장에 장애가 될 뿐이다. 왜냐하면 양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내가 왜 이와 같은 일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행위가 나 자신과 타인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끝없이 묻게 하기 때문이다. 교회성장주의는 개신교 내부에 부자교회와 가난한 교회, 풍족한 목회자와 궁핍한 목회자를 생산하면서도, 그 어떤 쪽이든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이상한 신학에 젖어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교회의 양적 성장에 있지 않다는 점만이라도 깨달을 수 있다면 그런 교회의 양극화와 교회권력의 집중화라는 성장신화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적윤리적 진공 상태에 빠져 있는 한국 개신교의 앞날은 무척 어둡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교회 개혁을 외치는 목소리는 가뭄의 단비처럼 반갑기 그지없다. 이제 성탄절이다. 예수 태어남의 의미를 되새기며, 또한 나를 있게 한 신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찌든 나를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겠다.
박상언(서강대학교 연구교수 , laeto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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