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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벌레로의 변신
2008.11.18
요새 뭐하냐, 어떻게 사냐. 궁금해 하실 분들도 있을 것 같아서 문안 인사 여쭙는 셈치고 붓을 들었다. 글쎄 뭐라고 할까, 아마 지하철(mtro), 회사(boulot), 집(dodo)을 반복하는 생활이라고 하면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집에서 주로 하는 일은 재우고 자는 일이다. 그러니 대개 9시만 되면 불이 꺼진다. 마치 농경민의 삶과 비슷하다.
게다가 갑작스레 휴대전화 번호마저 통신회사에 반납하고 나니 유목민에서 농경민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더욱 강하다.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려면 정해진 곳에 붙박이로 놓인 전화를 이용해야 한다. 연락을 받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어쩌다가 만날 약속을 했는데 차가 늦게 왔다거나 시간과 장소를 착각했다 하면 만회할 길이 없다. 게다가 종이 편지를 주고 받는 일도 훨씬 더 늘었다. 내가 사는 집 주소의 우편번호를 외우게 된 것을 보면 확실히 그런 것 같다. 결국 내 정체성은 우리 집 문패에 고정되어 있다. 저것 재미있겠는데 논문으로 한 번 써봐야지 하면서 오만 가지 세상 일들 사이를 떠돌며 촉수를 뻗치던 예전의 삶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요사이 내가 하는 일은 낱말들과 씨름하기라고 표현하고 싶다. 플로베르식의 ‘일물일어’를 구현하고 싶은 것은 아니나, 이쪽 말의 이런 낱말에 가장 근접하는 저쪽 말의 다른 낱말을 찾아내고, 글답게 옮기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멋있게 말하면 번역이고, 내 식으로 말하면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낱말들 사이로 기어들어가 하나를 먹어서 또 다른 하나로 누는 일을 주로 한다. 내가 하루에 먹어치우는 낱말의 갯수는 3,000개가 약간 넘는다. 사실 옮겨야 하는 글 모양도 지렁이 비슷하게 생겼다. 돋보기를 든 채 째려보고 있노라면 나 자신도 지렁이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진종일 낱말들과 씨름하다보니 입말이든 글말이든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다. 이런 표현, 저런 용어, 그런 개념을 써도 되나, 함부로 남발하는 것은 아닐까. 예전에는 내가 어떻게 그토록 용감하게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지난 날 내가 썼던 글들을 우연히 마주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남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는데 나만 아무 것도 모른 채 제 잘났다고 유치한 언사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구 뱉아낸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요즘은 글을 읽는 일도 힘겹다. 특히 글자랑하는 용감무쌍한 교수님들의 글일수록 읽기가 더욱 그렇다.
남은 먹으로 몇 마디만 더 하자. ‘종교문화 읽기’라고 했는데, 과연 종교가, 그리고 문화가 읽히는 것일까? 종교나 문화가 글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어서, 글을 읽듯이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연구의 대상물을 바라보는 학자들의 시선 자체가 읽기라는 형식을 탁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지 다 읽어내고자 하는 것일까?
내가 품었던 의문은 이런 것이다. 읽으려고 하지만 안 읽히는 것들, 읽히기를 거부하는 것들, 읽히기는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읽히는 결 아래에 숨어 있는 것들, 읽는 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원래부터 읽히도록 되어 있지 않은 것들은 어떻게 다룰 것인가? 종교문화 ‘읽기’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은 것들에 대한 관심을 담은 글이 있다면 당장 달려가서 ‘읽어’보고 싶다. 아니 ‘읽기’라도 제대로 보여주는 글이 있으면 다행이지 싶다.
조현범 (한국교회사연구소, hbthomas@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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