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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11호- 전철안에서(정진홍)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1. 4. 13. 17:04

전철안에서

2008.7.15


며칠 전에 전철 6호선을 탔다가 흥미로운 광고를 보았습니다. 전철 안에서 다음과 같은 행위를 하는 경우에는 법에 의하여 조치를 하겠다는 일종의 공적인 경고광고였습니다. 해당 사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상행위, 구걸, 선교, 소란행위”

일상 전철 안에서 누구나 겪는 조금은 짜증나는, 그러면서도 연민을 자극하는, 그래서 때로는 자책감이 일기도하는 일연의 행위들이 그대로 다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나열된 사항들이 분명하게 등가적인 것으로 기술되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상행위=구걸=선교=소란.

물론 그 현상들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일반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특정한 공간 안에서 그것이 그렇게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인식’이 아주 그른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광고의 출현은 비록 그것이 지극히 한정된 특수한 정황에서 드러나는 사실이라 할지라도 오늘의 종교현실을 새삼스레 주목하게 합니다. 선교를 주어로 떼어놓고 말한다면 이는 선교란 상행위이고, 구걸이며, 동시에 소란행위라는 서술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바로 그런 소란스러움, 구걸과 다르지 않은 것, 상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것입니다. 늘 하던 투로 말한다면 오늘의 우리의 일상 속에서 종교는 얼마나 철저하게 세속화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이 경고문은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겪는 종교현실은 이에서 조금도 비켜나 있지 않습니다. 사회구조가 반드시 자본주의적이어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살펴보아도 종교는 그것이 이념이든 신념이든 초월을 근간으로 한 비일상적인 경험이든, 어떤 언어로 어떻게 묘사되든, 잉여가치의 추구를 한결같은 목표로 삼습니다. 종교가 나를 위해 모두 내주는 것 같은데도 실은 결과적으로 내가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그런데도 나는 종교를 통해 상당한 이익을 누리며 산다는 자기만족을 누리도록 하는, 그런데도 종교는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는, 오히려 더 많은 이런 저런 이윤을 누리면서 스스로 크고 힘이 세고 끊임없이 이어가는 실체가 됩니다. 이거야 말로 가장 현명한 상행위의 전범(典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봉헌과 헌신과 복종으로 현실화되는 종교적인 삶의 태도야 말로 종교를 주체로 할 경우, 그것이 가지는 온갖 아우라를 제거하고 남는 ‘구조’를 일상의 언어로 묘사한다면 정확하게 그것은 ‘구걸의 성화(聖化)’현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는 일반적으로 이를 ‘거룩한 의무’라고 할 것이지만, 전혀 그러한 의무에 의해서 자기를 지탱하는 것이 종교에서 일컫는 궁극적 실재의 속성일 수 없음을 종교자체의 자기 설명의 논리를 준거로 유념하면, 이러한 의무의 부과는 신의 작희(作戱)라고 할 수밖에 없을 터인데, 따라서 그러한 맥락 속에서 ‘순수’하게 말한다면 그대로 이는 구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종교란 또는 신이란 그의 구걸에 반응하는 연민에 의하여 겨우 지탱되는 그러한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런데 거래도 구걸도 그것은 쉽게 이루어지거나 소리 없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흥정과 티격태격 하는 일, 겨룸과 다툼, 갈등과 혼란이 필연적으로 수반됩니다. 받아 좋고 주어 좋은 결과가 왜 없겠습니까만 그것이 곧 바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려니와 늘 지속할 수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감춰진 승자와 패자가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혼동과 머뭇거림과 절규와 체념과 의지와 승화, 그리고 자기와 또는 타자와의 투쟁은 필수적입니다. 소란은 상행위와 구걸의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소란스러움은 종교의 가장 직접적인 묘사 가능한 현상입니다. 사실상 정적과 고요를 추구하는, 그리고 그것을 행하는 종교적 행위는 자신의 소란스러움을 세속의 속성으로 착각한 일종의 자기보상행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광고문을 읽고 되읽으면서 저는 하이퍼 잠프를 거듭하는 제 사색의 흐름을 이렇게 좇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 이 문구는 성의 속화현상만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행위는 오늘 우리의 삶에서 어느 듯 구걸이고 소란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선교행위이기도 했습니다. 구걸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소란함이기도 하지만 오늘의 상행위이기도 했고, 소란도 그 구조를 들여다보면 그것은 상행위를 받쳐주고 구걸의 그늘을 가려주며 자신의 존재이유를 스스로 천명하도록 해주는 어쩌면 선교의 가장 직접적인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는 속의 성화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삶의 모습도 성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지요. 제 손자 녀석이 여섯 살 때 \'Why 똥?'이라는 그림 곁들인 책을 읽더니 “똥이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거구나!” 하더군요. 그러고 보면 이 광고는 성/속이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존재를 읽는 인간의 의식이 짓는 하나의 현상의 이름이라고 하는 ‘인식’을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밖에서는 삶의 지극히 직접적인 현실 속에서 온갖 종교들이 그 삶이 직면한 문제를 가지고 그에 대한 어떤 인식이 마땅하고 옳으며, 그에 대한 실제적인 대처 방법은 어떠해야 하며, 그것을 책임질 나쁜 사람은 누구고, 바른 제도는 무엇이며, 넘어서야 할 이념은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무성한 발언이 들립니다. 그 ‘절대적인 발언’들이 자꾸 전철 안의 광고와 중첩되면서 저는 짙은 아지랑이 속에 더 깊게 묻히는 것 같아 조금씩 두려워집니다. 그러면서 전철의 광고가 인류의 종교사가 보여주는 ‘진실’을 기막히게 요약해서 가장 현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상행위=구걸=선교=소란행위!

정진홍(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mute9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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