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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신문>에 나타난 개신교의 문명관
2012.6.5
<그리스도 신문>(Christian News)은 1897년 4월 1일에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를 편집장으로, 빈튼(C.C. Vinton) 의사를 발행인으로 하여 주간지로 발행되었다. 이 신문은 기독교 기관지로서 뿐만 아니라 종합주간지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신문의 창간호에는 기독교의 선교목적 이외에도 “선진국가의 여러 가지 제도, 문물, 관습 등의 지식과, 농민들을 위한 농사 계량법, 공업기술의 보급 등”을 다루겠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 신문>의 이러한 발행목적은 이 신문이 단지 기독교 전도지의 성격을 떠나 서구의 근대적 신문 ‘매체’로서의 기능을 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근대적 신문 매체로서 <그리스도 신문>을 통해 새로운 서구의 ‘인쇄·출판문화’를 조선에 보급하였다. 그러한 새로운 서구의 ‘인쇄·출판’문화로서 이 신문은 두 가지 점에서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첫째, 이 신문이 ‘순한글’ 신문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 전략 가운데 하나는 하층민 선교였다. 이는 기독교의 광범위한 확대를 위한 필수적인 전략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하층민들이 비교적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을 신문의 주요 문자매체로 설정하고 보급하였다. 둘째는 신문의 정기적인 발행이었다. 이는 1897년 발간 이후 1908년까지 정기적으로 이 신문이 발행되었음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특징은 조선의 대중들에게 문자문화를 일상화 시켰다. 다시 말해, 배우기 쉽고, 읽기 편한 한글을 신문의 문자로 선택하여 조선의 대중들에게 문자문화로 접근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신문을 정기적으로 발행하고 독자 투고란을 지면에 할당함으로써 조선의 대중들에게 ‘읽기·쓰기’를 일상화하여 문자문화를 대중화시켰다. 결국, 개신교 선교사들은 서구의 ‘인쇄·출판’문화를 조선에 적극 활용하여 조선의 대중들에게 문자문화로의 접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자문화의 일상화는 당시 조선사회에 변화를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매체’는 단지 인간의 물질적인 도구로서 편리성을 제시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매체’는 인간과 도구적 대상의 상호작용으로서 효과적인 ‘생산’을 만들어내는 ‘매개’라고 할 수 있다. ‘매체’는 단지 기술과 물질로서 대상을 의미하지만, ‘매개’는 행위자와 대상을 연결해주는 상호작동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매체를 통해 매개된 수단은 ‘매체화된’ 무엇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매체화된’ 무엇은 상호작용을 통한 의미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그리스도 신문>이라는 매체는 개신교 선교사들과 조선인들을 매개하는 수단임과 동시에 의미를 만들어내는 생산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매개’로서 <그리스도 신문>은 다양한 ‘문화·기술·종교’가 혼합되어진 복합적인 공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신문>이 생산해내는 의미는 문화와 종교 그리고 기술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정황 속에서 읽어내야만 한다. 여기서 기술은 근대적인 ‘문자문화’의 보급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문자문화의 일상적인 실천을 만들어내어 제도화시킨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문화와 종교는 문자문화의 일상적인 실천 속에서 문명과 기독교화라는 의미를 생산해 낸다.
<그리스도 신문>은 개신교 선교사들의 주간지였으며, 주로 개신교 선교사들의 조선에 대한 인식이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신문이 생산해 내는 의미 역시 선교사들의 시각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선교사들이 만들어내는 의미와 이를 수용하는 조선인들의 의미가 서로 다르게 생산될 수 있지만, 당시 <그리스도 신문>에 대한 조선인들의 언급이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 신문>에 대한 조선인과 선교사들의 상호인식을 알아보기란 어렵다. 단지, <그리스도 신문>의 생산자인 선교사들의 조선에 대한 인식과 신문을 통한 생산된 의미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개신교 선교사들이 <그리스도 신문>을 통해 생산하고자 했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문명화’와 ‘기독교화’ 이다.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문명화’와 ‘기독교화’는 늘 운명을 같이하는 ‘짝패’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 신문>은 ‘문명화’와 ‘기독교화’가 동일한 위치에서 생산되는 의미가 아님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리스도 신문> 안에서 ‘문명화’는 ‘기독교화’로 수렴된다. 이는 이 신문이 생산해내는 논리적 구조를 통해 만들어진다.
이 신문은 조선의 ‘문명화’를 위한 많은 기사들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문명화’는 크게는 ‘물질적 문명화’와 ‘정신적 문명화’로 구분되며, 보다 구체적으로 ‘물질적 문명화’는 ‘과학기술의 문명화’와 ‘국가·제도적 문명화’로 구분되어진다. 여기서 ‘과학기술의 문명화’는 서구의 테크놀로지를 받아들여 조선의 부국강병을 꾀해야 한다는 논리로 설명되어 있다.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조선은 자연 상태의 ‘야만’적 국가는 아니지만, 자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부국강병한 ‘문명화’된 민족 또한 아니다.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조선은 ‘야만’과 ‘문명’의 사이에 위치한 ‘반문명화’된 국가이다. 따라서 조선은 서구의 근대화된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부국강병한 ‘문명국’으로 발돋움해야한다는 것이다.
또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선의 국가·제도 역시 ‘반문명화’된 상태에 놓여있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법률적인 차원에서 조선은 평등한 사법제도가 시행되지 않으며, 이러한 불평등성은 조선인민들의 정치에 대한 민주적인 참여를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여기에 비합리적인 관료제도는 조선인민들의 불평등성을 가속화 시킨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조선의 교육제도 역시 낙후하여 조선인민들에게 국가의 정책과 충효의 ‘이치’를 깨닫게 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국가·제도적 문명화’는 조선의 근대국가로의 탄생을 의미하였으며, 국가와 개인이라는 근대적인 인식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정신적 문명화’는 ‘세속적 도덕·윤리의 문명화’와 ‘내면적 종교성’으로 구분될 수 있다. ‘세속적 도덕·윤리의 문명화’는 선교사들의 조선인에 대한 인식이 고스란히 내재되어 있다.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이 근면하지 못하며, 거짓말을 즐겨하고, 남녀차별과 잘못된 결혼풍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근면과 진실함 그리고 남녀의 평등과 결혼에 대한 올바른 풍습은 근대적 국가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따라서 신문의 기사들은 조선이 ‘문명화’된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근대적인 윤리와 도덕관에 따른 일상적인 삶의 원칙을 재조정해야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면적 종교성’, 이것은 개신교의 종교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내면성’은 인간의 ‘영혼’을 창조주가 만들었으며, 이 영혼의 창조주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생활하여야 한다는 것이 주요한 골자라고 할 수 있다. 신은 물질적인 것이기 보다는 정신적인 것이며, 물질적인 대상에 대한 숭배는 미혹한 인간이 만들어낸 ‘미신’이라고 신문은 설명하고 있다. 신문은 올바른 인간으로 복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을 창조한 신의 종교인 기독교를 믿어야 하며, 마음 속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기도하며, 예수의 대속을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듯 <그리스도 신문>은 ‘물질적 문명화’와 ‘정신적 문명화’를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화는 결과적으로 ‘기독교성’으로 수렴된다. 이는 ‘문명화’의 모든 내용이 ‘내면적 종교성’으로 수렴되는 구조를 통해 구성된다. 신문은 많은 기사들을 통해, 물질적인 ‘이치’ 그리고 정신적 ‘이치’를 깨닫는 인간 혹은 개인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은 창조자의 영혼을 담지하고 있다. 창조자의 영혼을 담지하고 있는 개인은 인간과 만물이 창조자에 의해 만들어진 ‘이치’를 깨닫고 자신의 삶을 내면적인 ‘신’에게 고백하고 대화(기도) 함으로써 삶의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신문은 신의 영혼과 마음을 담지한 인간이 ‘기독교화’ 됨으로써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문명화’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논문으로 <라이온 킹의 영웅신화 구조와 이데올로기비판>이 있고, <비평으로서 신화 연구하기>라는 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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