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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가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
- 정약용 관련 활동을 중심으로
2012.5.15
근대화를 향한 지난 100여년의 여정 속에서 한국유교는 과거의 찬란한 영광을 뒤로하고 미증유의 좌절과 침체를 경험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장구한 세월 동안 주류 전통이었던 유교가 근대사회로 전환되면서 문화의 주변부로 밀려나가는 역전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한때 유림(儒林)을 대표하는 성균관에서 추진하던 교의 종교화가 좌절된 이후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개혁이 성취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유교의 ‘종교성’ 보다는 오히려 조선 유학자 개인과 관련된 사회적 활동이 더 주목되고 있다. 이런 사례의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18년간의 강진 유배생활을 학문적 집대성의 기회로 승화시킨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다. 특히 다산이 출생한지 250주년이 되는 올해에는 그를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따라서 다산 관련 주요 단체의 활동을 살펴보면 한국사회에서 유교가 살아가는 방식의 일단(一端)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조상을 받드는 종친회(宗親會) 가운데 나주정씨월헌공파종회(羅州丁氏月軒公派宗會) 중심으로 만든 다산학술문화재단은 다산 정약용의 학문과 사상을 연구하는 현대적인 학술작업을 한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1998년 설립된 다산학술문화재단은 다산학이라는 학술저널을 발간하고 다산학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함으로써 다산의 학문과 사상을 재조명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학술에 초점을 두고 활동하기 때문에 재단의 다산연구 사업에는 주로 한국학 또는 국학 분야의 중진 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특히 올해 다산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여 동 재단은 다산관련 역사문화 콘텐츠 개발의 일환으로 다산의 삶과 사상궤적을 지도화하여 구현한 사상지도(思想地圖)를 국내 최초로 제작해서 배포할 예정이다.
다산학술문화재단의 학문적 업적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정본(定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출간이다. 2004년부터 진행한 정본 사업을 완료하고 다가올 10월에 총 37권으로 출간될 정본 여유당전서가 바로 그것이다. 정본 여유당전서는 현대 한국에서 통일된 표점(標點) 원칙을 가지고 다양한 판본을 교감(校勘)하여 유학자의 정본 문집을 완성하는 첫 번째 사례가 된다. 현재 중국에서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서 유교 경전 관련 문헌을 총정리하는 ‘유장(儒藏)’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다산의 사서(四書) 관련 문헌도 이미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유교 문헌을 현대적인 표점과 교감 원칙에 따라 정리하는 정본화는 한국학의 세계화를 위해 시급한 과제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정본 여유당전서는 이러한 학문적 과제의 물꼬를 트는 선구적 업적으로 평가될 것이다.
다산학술재단이 학문적 연구 활동을 위주로 한다면, 다산연구소는 일종의 시민운동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대비된다. 2004년에 설립된 동 연구소는 사회의 제도개혁과 시민의 의식개혁을 병행해 선진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목적의식을 표명하고 있다. 특히 연구소를 대표하는 이사장 박석무는 일찍이 다산이 유배지인 강진에서 가족에게 쓴 서신을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라는 이름의 번역서로 내놓아 다산의 인간적 면모를 널리 알린 바 있다. 다산학 전파에 대해 거의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소명의식을 가진 그는 현재 약 35만 명이 넘는 시민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풀어쓰는 다산이야기>라는 글을 메일링 서비스를 통해 보내고 있다. 그의 글에는 다산의 개혁사상을 통해 현대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이 표명되고 있다.
다산연구소의 또 다른 활동 가운데 주목할 만한 부분은 바로 목민대상이다. 목민대상은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에 앞장서는 지방자치단체를 발굴하여 시상하는 것으로, 2009년에 시작해서 올해 제4회 목민대상 시상식을 가진 바 있다. 특히 다산의 목민심서에 나오는 3기(紀) 곧 율기(律己)봉공(奉公)애민(愛民)을 지방자치 단체장이 갖춰야할 자질이라고 규정하고, 각각에 해당되는 항목을 한국사회의 행정에 적용하여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율기에는 청렴성과 정직성공직사회 기강 확립을, 봉공에는 대민 봉사지역경제 활성화를, 애민에는 친화적 주민정책 추진지역주민 복리 증진을 배속하고 이를 지표로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목민대상은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한국 지방자치단체의 행정을 평가하는 현대적인 지침으로 활용되는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다산연구소가 목민대상을 통해 지방행정을 평가하는 제도를 만들었다면, ‘강진군 다산교육관 및 수련원’(약칭 다산수련원)은 실제 다산의 목민정신으로 공무원을 교육하고 있다. 2005년 에 정약용의 유배공간이던 다산초당 근처에 설립된 다산수련원은 2011년부터 ‘다산 공직관 학습 및 체험’ 과정을 개설하여 행정안전부의 지원 아래 전국 각지에서 온 공무원들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작년에는 다산수련원에서 약 1500명이 교육을 이수했으며, 올해는 20기에 걸쳐 약 2000명의 새내기 공무원이 참여해서 공직관 교육을 받을 예정이다. 원래 강진군에서 숙박시설 중심으로 세웠던 수련원은 기독교 배경의 광주 YMCA가 2007년부터 풍부한 시민교육 경험을 바탕으로 그 운영을 담당함으로써 공무원 교육의 새로운 장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다산수련원의 공무원 교육 프로그램에는 다양한 과정이 포함되어 있지만 ‘현대적 의미의 목민심서’를 배우는 과정이 가장 중시된다. 원래 다산의 목민심서(牧民心書)는 다산의 마음, 곧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이 책을 통해 구제되기를 바라는 위민(爲民)의 마음을 담고 있다. 다산 자신은 목민하려는 마음은 있지만 그럴 수 없어서 책 이름을 ‘심서(心書)’라고 했는데, 공무원들은 이 책을 통해 역사적 조건을 초월하여 다산의 마음과 만나고 국민을 위하는 공직자로 거듭나도록 교육받고 있다. 이와 같은 교육 프로그램은 공무원의 부정부패를 척결해야 한다는 중앙정부 차원의 요구, 지역 연고의 역사적 인물을 활용하려는 자치단체의 필요, 그리고 시민사회단체의 앞선 기획력이 ‘다산’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고리로 결합되어 탄생한 것이라 하겠다.
유림조직 차원에서 유교의 ‘종교화’는 정교분리(政敎分離)를 내세우는 현대한국의 헌법질서 속에서 유교가 분명한 정체성을 가진 사회조직으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원래 종교와 정치의 연속성을 중시하던 유교를 사적인 믿음의 영역으로 제한하려는 근대적인 종교 개념에 대해 유림 내부의 거부감은 여전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약용과 관련된 사회 활동이 활발한 현실은 유교의 사회적 존재 방식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우리가 보았듯이 현재 다산 관련 단체가 한국학을 선도하고 시민운동을 전개하며 공무원을 교육하는 등 다양한 층위의 사회적 실천이 전개되고 있다. 특히 공적인 시민윤리나 행정지침으로 정약용이 활용되는 사례에서 유교가 사회적인 생명력을 유지하는 또 다른 길의 단서를 찾고자 한다면 너무 섣부른 것일까?
※ 이 글은 2012년 봄 4월 28일 한국종교학회에서 발표한 “현대 한국유교의 현황과 과제” 가운데 정약용 관련 부분을 중심으로 뽑아서 보충한 것입니다.
서울대학교 강사
주요 논문으로 〈정약용의 수양론 체계〉, 〈유교의 수양론과 물의 이미지〉 등이 있고, 공저로는 《스승 이통과의
만남과 대화: 연평답문》, 《근대한국 종교문화의 재구성: 근대성의 형성과 종교 지형의 변동Ⅱ》 등이 있으며, 공역
에는 역주 《시경강의(詩經講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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