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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민의 종교문화, 무엇이 문제인가?

 

 

2012.7.10

 


        한종연과 UBC(브리티시 컬럼비아대)가 지난 6월 18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동백룸에서 전문가 20여명을 모시고 조선후기 민의 종교문화에 대한 전문가 합동 워크샵을 열었다. 이 합동 워크샵에서 토론된 내용 중 1부의 내용(1-3발표)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발표된 내용은 올 가을에 단행본으로 출판될 예정이다.


        첫 번째로 <입후와 입양: 조선 후기 유교적 가족질서의 확산과 의례적 양상>에 대해 박종천의 발표가 있었다. 이 글에 대해 허남린은 경제적 이익을 가족질서와 의례적 양상의 변화의 가장 큰 요인으로 본다면, 그것을 통해 유교로 표명되는 조선시대의 가면을 벗겨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경화사족, 재지사족, 몰락사족, 중인, 양민 천민 등 4개의 계층(신분)이 서로의 이해를 위해 경쟁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공통점은 각 집단이 자신의 힘을 집중하여 인접 집단과 차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먼저 경화사족은 종법을 주장하였고, 재지사족은 경화사족과 경쟁하기 위해 문중 공동체를 확고히 하였다. 그들은 불천위를 중심으로 한 넒은 의미의 친족관계를 형성하였다. 즉 문중을 형성하여 질보다는 양의 전략으로 자신들의 향권을 보존하려고 한 것이다. 몰락사족은 경화사족에 가까운, 변별력이 강한 전략을 세워서 입후를 한 것이다. 중인 양인 천민은 신분 상승을 위해 이들을 모방한 사회적 실천을 행한 것으로 본다고 하였다.


        이어 입후와 이양배후에는 결국 자기 집단의 실용적 이해와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보이는데, 의례와 같은 문화적 수단에 대응하는 물질적 수단은 없었는지? 물질적 구조의 변화 양상은 없었는지? 등을 질의했다. 또 비용이 덜 들고 저항이 덜한 문화적 수단(의례)을 반드시 유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 혹시 실제 의례 운용에서는 반유교적 사회라고 할 수는 없는지에 대해 질문하였다. 이에 대해 발표자는 첫 질문에 대해서는 유교의 내재적인 요인보다 외적인 요인, 또는 집단의 이익 추구가 의례 변화의 계기가 된다고 했다. 두 번째 물질적 수단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하층에서는 군역 회피가 주요 요인이 되었으며, 상층에서는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예컨대, 서울 중앙부(노론) 즉 경화사족에서는 서자, 첩자의 계승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서자 첩자를 가계 계승자로 세우면 나중에 출세에 악영향이 주어서 가문에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재지사족의 경우에도 서자 첩자를 세우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같은 이유에서다. 어떻든 공간적인 의례들을 통해 끊임없이 계승되는 가치가 바로 유교적인 함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에 대해 정승모는 출현시기가 다른 4개 계층의 입후 입양 문제를 한 자리에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몰락이란 말 그대로 상대적 개념이고, 경화사족의 등장은 다른 계층에 비해 늦게 출현하였다. 따라서 같은 차원에 놓고 입후관계에 있어 불천위를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종법은 기제 단계에서 묘제 단계로 넘어가면서 변하게 되는데, 불천위를 부여받지 않더라고 묘제 단계가 되면서 소종의 대종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원친(遠親)에서 입후를 잇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라는 지적도 했다. 또 이욱은 공신을 나누는 문제를 보면 입후 입양이 국가의 통제술일 수 있다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사람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나선 허남린은 <임진왜란 전후의 기복(起復:상을 당해 휴직 중인 관리를 복상기간 중에 직무를 보게 하던 제도)을 통해 보는 조선사회에 있어서의 효의 정치>에 대해 발표하였다. 이 글에 대해 논평한 박종천은 효를 공과 사의 영역으로 나누는 논쟁이 예송 등에 계속 등장한다며, 대체로 사/정과 공/의라는 대립으로 나타나는데, 사/정과 공/의 논쟁이 효와 충의 대립과 일치하지 않다는 점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또한 기복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경우인데, 사족의 자율적 권력 강화로 이해할 수는 있는지, 기복의 대상과 시기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기복을 통해 독자적 권력이 확보된다는 주장은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발표자는 효는 왕권에 대해 사족의 막강한 무기라며, 사족의 독자적인 권력의 확보 과정을 보면 기복의 관행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어 같이 논의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위기 상황에서만 기복이 나타나는 것이 맞으나 이 위기 상황에 대한 정의가 서로 다르다. 기복에 응하지 않는 사족들의 이유를 보면 “위기 상황이 아니다”라는 것이 주된 이유일 경우가 많다. 효를 어떻게 정의하고 담론화 할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유교적인 가치를 깔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단화 할 수 있는 것 중에는 예(禮) 또는 유학적 지식들이 있다. 이런 것들을 자신의 담론에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이에 이욱은 <<기복등록(起復謄錄)>>이란 자료가 있는데 이 자료를 이용하면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였다. 효가 권력화되는 것을 보면 국왕의 경우 효의 실천을 통해 사적인 효를 공적인 효로 바꾸려고 많은 노력을 한다. 이는 국가 권력의 상대화, 개인에 대한 통제에 대한 저항의 논리에서 볼 수 있다. 禮, 義가 아닌 인정적인 측면에서 효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조선 초기까지 고려의 풍습이 남아 있기 때문에 역월제(易月制: 역월제란 달을 날로 바꿔서 보는 것)의 전통과 기복이 연관될 가능성이 많다는 지적에 조선 전기의 역월제와 조선 후기의 경우를 구별해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반론이 있었다. 그러면 조선 후기 엄격한 의미에서 3년상은 어떤 것인지가 긍금하다는 질문에 박세당의 3년상의 경우를 보면, 효를 살아 있을 때와 다름 없이 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16, 17세기 죄인으로서 몸을 상하게 할 정도로 3년 상을 치르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후기에는 시묘가 무덤 중심이 아니고 가묘 중심으로 가면서도 시묘살이는 계속 되었다고 한다.


        세 번째로 정승모는 <성황사 및 성황신앙의 변화와 마을신앙의 다양성>에 대해 발표하였다. 이 글에 대해 진철승은 논평에서, 성황신앙 자체에 대한 것이 설명되지 않은 것 같다며 여러 질문을 하였다. 성황사, 성황단, 성황당의 차이는 무엇인가? 건물의 양식이나 신단의 차이가 나는가? 민간 신앙에서 누석단(돌탑)하고 성황사의 관계는 무엇인가? 신주, 위패, 신상, 초상화 등 신격들의 회화적인 양식이 각각 어떻게 다른가? 고려시대 신상들은 상당히 많았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 남은 것은 왜 별로 없는가? 관제 성황제, 여제, 산천제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등에 대해 질의하였다, 이런 질의에 대해 발표자는 성황사, 성황단, 성황당의 차이는 옛날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성황사(관제)나 성황당(민간신앙의 건축)에는 나무, 돌로 된 신상이 있다. 대개는 군현을 단위로 하기 때문에 일제시기로 들어오면서 사라진다. 그리고 고려에는 대개 소상이었고, 후에 소상보다는 유교적인 상징으로 영정, 더 간소화되면 위판을 사용하였다. 성황당 신체가 간소화되는 추세를 볼 수 있다.


        한편, 이욱은 여제를 지내는데 성황신이 주신이 된다고 지적했다. 이는 명나라에서 처음 여제를 지낼 때 하나의 양식으로 고착화된 것이고, 성황신이 죽음 이후의 세계를 주재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중국의 경우에는 사후세계에 대해 성황신의 역할이 컸지만 조선 시대에는 그런 역할은 없었고 단지 의식의 한 양식으로 성황신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에 발표자는 여제를 지내도 성황신에게 먼저 지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성황제가 된다. 관제에서 소상은 없었으며, ‘단’이 덜 고려적이고 덜 음사적이라고 밝혔다. 위패는 관아에 보관했다고 했다. 또한 장석만은 음사라는 용어에 대해 이 당시에 미신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는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에 대한 질의가 있었다. 이에 대해 발표자는 좌도는 주로 도교적인 것이고, 음사는 미신적인 내용도 표현된다고 하였다. 그때는 주로 백성을 현혹한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어 미신보다는 미혹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리고 제사를 받들고 지내야 할 근거가 없는 데도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음사라고 한다. 단연히 국가에서 공인된 제사는 음사에서 제외된다고 하였다.


                                                                   
 윤승용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소장


seyoyun@yahoo.co.kr


논문으로〈한국사회변동에 대한 종교의 반응형태 연구〉,〈근대 종교문화유산의 현황과 보존방안〉등이 있고, 저서

 

로《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공저),《한국 종교문화사 강의》(공저),《현대 한국종교문화의 이해》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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