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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교육, 진화론과 창조론
2012.6.26
최근 고등학교 과학교과서를 출판하는 인정교과서 업체 몇 곳에서 ‘시조새는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이다.’라는 기술과, ‘말(馬)의 진화’ 부분을 삭제하거나 수정하기로 했다.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이하 교진추)라는 단체가 지난 해 12월과 올해 3월에 교육과학기술부에 삭제를 청원한 결과다. 이 일은 과학저널 ‘네이처’에서 ‘한국, 창조론의 요구에 항복’이라는 기사가 나오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국내 언론이 관심을 갖고, 인터넷에서 큰 이슈가 되고, 관련 학술 단체의 대응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언뜻 보기에 이번 과학교과서 사건은 순수하게 과학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시조새’나 ‘말의 진화’에 대해 진화론 내부에서도 이미 1970년대부터 논의가 있었고, 교진추에서 제출한 개정청원서도 과학적 측면에서 반박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진추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결’이나 ‘과학에 대한 종교의 간섭’이라는 평가에 대해 유감을 표하면서, 청원서는 진화론의 오류를 수정하는 과학적 학술 논쟁이라고 한다. 과학적인 문제라면 과학적으로 풀면 될 것이다. 한국고생물학회를 비롯해서 ‘생물학정보연구센터’(BRIC) 등 관련 학술단체와 과학자들이 구체적인 대응에 나서고 있다. 과학 작업의 본질에 따라, 반론에 대해 심도 있는 반박과 토론이 제시될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진화론의 최근 이론까지 제대로 반영된 과학교과서를 만들고, 과학교육 전반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을 하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한국사회에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올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부터 ‘가시적 결과’까지, 이 사건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보면서, 기시감(旣視感, 데자뷔 Dj Vu)이 들었다. 기시감이란 처음 보는 대상을 이전에 보았다는 느낌을 드는 현상인데, 과학교과서에서 진화론의 일부를 삭제하고 수정하는 사건에서 이걸 느낀 것이다. 왜 그럴까?
사건의 진행과 구조가 이미 알고 있었던 미국의 사례와 비슷해서다. 1981-2년 미국 아칸소주와 루이지애나주에서 ‘동등교육법’을 통과시켰다. ‘진화론과 창조론을 공립학교 과학시간에 동등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이 법이 통과되면서, 전 미국이 떠들썩한 재판으로 이어졌다. 일부 창조과학진영을 제외하고 미국 주류교단 총회에서 결의문까지 채택하면서 반대했던 ‘동등교육법’은 위헌으로 결론 났다. 이런 흐름은 ‘도버교육위원회 사건’에서도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2004년 펜실베니아주 도버시 교육위원회는 ‘진화론은 생명체의 기원을 설명하는 유일한 과학이론이 아니기에, 생물학 시간에 지적설계(Intelligent Design)론도 함께 가르쳐야 한다고 과학교과과정을 바꾸었다. ‘창조주의자’(필자는 창조론(Theory of Creation)과 창조주의(Creationism)를 구별한다. 전자는 기독교 신학의 주제 가운데 하나이며, 후자는 과학적창조론(Scientific Creationism, 창조과학)으로 특정 교리적 신념을 고수하는 일부 근본주의 개신교인의 입장을 말한다.)들이 위원회의 다수를 점한 결과였다. 또 다시 미국 전역을 진화론과 창조론 논쟁에 빠뜨린 이 사건은 2005년 법원이 ‘지적설계론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라고 판결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지금도 창조주의자들은 기독교 국가인 미국 사회에서 사회적 영향력을 배경으로 대학사회와 과학계까지 자신의 입지를 넓히려고 시도하고 있다.
최근 한국의 과학교과서 사태는 이 문제를 제기한 방식과 주체를 볼 때, 미국의 사례와 아주 유사하다. 종교적 측면을 감추고 과학적 측면을 통해서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을 기본 전략으로 삼는다. 즉 진화론을 순수한 과학적 차원에서 오류로 가득한 가설이라고 공론화시키면서, 궁극적으로는 진화론을 가르치는 교육제도와 교과서 개정을 시도하고 있다. 교진추는 6월말에 ‘화학진화론은 생명의 기원과 무관하다’는 3차 청원서를, 오는 9월에는 ‘생명계통수는 허구이다’라는 4차 청원을 낼 계획이다. 이런 청원서를 통해 인류의 진화나 다윈 진화론을 가르치는 교육제도를 바꾸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인 교진추 역시 청원서 제출이 순수하게 학술적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수면 위의 드러난 ‘건전한 과학발전과 학술 진흥에 이바지하겠다.’는 교진추의 ‘과학적 측면’이다.
이 사건의 수면 아래에서는 ‘종교적 측면’이 지속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교진추라는 청원 주체는 근본주의 개신교 성향을 지닌다. 교진추는 2008년에 시작된 한국진화론실상연구회와 창조과학회 내 교과서위원회가 2009년에 통합한 개신교 단체다. 이 단체는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진화론의 실체를 학 적 견지에서 밝혀 궁극적으로 진화론 교과서를 개정하는 목표’를 갖고 있다. 더불어 교회학교에 바른 (개신교적) 세계관을 가르치고, 개신교계 학교와 개신교인 교사들의 교육하고, 한국교회 차원에서 교과서 개정운동을 계획하고 있다. 스스로 창조과학회 산하단체라는 것을 부정하지만, 창조과학회나 지적설계론처럼 ‘진화론을 유물론적 범신론에 기초한 자연주의 사상으로 증명되지 않는 가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들은 진화론과 기독교 신앙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면서, 진화론 비판에 집중한다. 하지만 적어도 청원서를 통한 진화론과의 공방은 철저하게 ‘과학적 차원’에 국한해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내부적으로는 종교적 의도를 지니고 있지만, 다종교 사회인 한국에서 ‘진화와 창조’라는 개신교적 논쟁으로 확산시키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과학교과서 사태를 보면서 두 당사자처럼 보이는 과학계와 개신교회의 반응은 다르다. 과학계는 비교적 활발하게 대응하고 있고 과학적 논의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열린 공간에서 개방적으로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이에 반해 한국 개신교회나 신학계의 반응은 거의 잠잠하다. 청원서가 철저하게 ‘과학적’ 성격에 집중함으로써 논쟁을 ‘과학 대 과학’으로 제한하고 있기도 하지만, 개신교계의 거의 무반응에 가까운 침묵은 현재 한국개신교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래 개신교 신학에는 창조에 대한 다채로운 신학적 논의, 진화론에 대한 다양한 태도, 창조과학이나 창조주의에 대한 신학적 성서적 비판이 있다. 하지만 ‘교회를 위한 신학’이 신학대학의 지배적인 정서를 형성하고 있는 상황과, 성장의 정체에 따라 위기감을 갖고 보다 보수화되는 한국교회를 고려할 때, 이 사건에 대해 비판적인 신학적 목소리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번 사건이 그저 그런 종교와 과학의 논쟁 중 또 하나의 사례가 될 지, 한국의 과학교육이나 한국 개신교에 생산적 결과를 가져오는 사례가 될 지, 다소 우려의 눈길을 가지고 귀추를 주목한다.
호남신학대학교
jshin0440@hanmail.net
논문으로 <한국 기독교 신학자들의 종교와 과학 담론>, <한국사회의 종교갈등의 현황과 구조탐구> 등이 있고, 저서로
<<종교전쟁>>(공저), <<한국신학, 이것이다>>(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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