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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 총재의 서거에 즈음하여
2012.9.11
통일교 문선명 총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스로 말했듯이 참으로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킨 생애를 살았습니다. 어쩌면 그 분의 생전이 그러했듯이 그의 사후에도 그 분에 대한 논의가 쉽게 잠재워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소박하게 말하면 그 분은 비조나리(visionary)였습니다. 온전한 행복, 완전한 평화를 추구했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져야하는 자리는 가정이고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 없는 원인은 사람의 일그러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일그러짐이 펴지고 얼룩이가 말끔히 가셔지면 모든 것은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이 보다 더 순수하고 소박한 꿈은 없습니다. 그 분은 그렇게 맑은 비조나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그것을 실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일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그 조직의 정당성을 논리화하는 일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혼례를 비롯한 의례를 다듬는 일도 그 공동체의 공동체다움을 위해 당연히 기울여야 할 관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온갖 ‘산업에의 진력’도 이를 위해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돈이 있어야 꿈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확신이 그 바탕이었다고 판단됩니다. 결과적으로 그 분의 이러한 태도는 새로운 ‘종교’를 출현하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그 분은 철저한 리얼리스트(realist)였습니다.
흔히 우리는 비조나리와 리얼리스트는 어긋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경우 그 둘은 갈등적입니다. 쉽게 조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비전의 드높기가 심할수록 더욱 그 비전을 현실화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에서의 무력감이 바로 비전의 동인(動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둘 사이의 갈등에 대한 인식에서 비로소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면서 그 안에서 다시 자신의 꿈과 자신의 현실을 다듬습니다. 그 역설의 의미를 빚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이 근원적인 역설을 스스로 부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그 역설의 지양이 가능하다고 하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 신념에 기반을 두고 자신의 비전을 더 ‘비현실적일 만큼 드높게 승화’시켰고, 자신의 실제적인 행동도 더 ‘비현실적일 만큼 강하게 추진’해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문제는 바로 이 ‘비현실성’에 있었습니다.
그 분을 사이비교주나 이단으로 여겨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 일연의 종교계 반응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종교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탈세를 범한 사기꾼으로 치부하는 비난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기업의 현장에서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가정 안에서 일고 있다고 전해지는 혈연간의 갈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가정에서 겪는 적지 않은 일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가 그 분의 삶 속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비난의 실제여부가 아니라 그 분이 스스로 함몰되어 있던 비전의 ‘비현실적 승화’와 실제적인 행동의 ‘비현실적인 강화’입니다. 달리 말하면 비전과 현실을 겸허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엮고 다듬어 그 갈등을 승인하고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의미의 실재로 만들기보다 그 둘을 각기 한 없이 들어 올리고 끝없이 확대함으로써 생긴 ‘비현실성의 늪’에 스스로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를 그 분의 메시아로서의 자의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이 메시아로서의 자의식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이를 천명하였다는 사실을 굳이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꿈과 현실의 갈등을 아파하는 메시아와 그 둘을 지양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아예 이를 간과하는 ‘절대적 실재’로서의 메시아는 다릅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스스로 고통 받는 제물로서의 자의식을 지니고 자신의 디비니티(divinity)안에 휴머니티(humanity)를 담습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제물의 봉헌을 요청하는 자의 자의식을 지니고 자신의 휴머니티 안에 디비니티를 담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디비니티(divinity)는 휴머니티(humanity)를 지워버리게 되고 그 휴머니티는 디비니티를 밀어내게 됩니다. 결국 그 디비니티는 휴머니티를 빙자한 ‘사치스러운 천개(天蓋)’가 되고 그 휴머니티는 디비니티를 빙자한 ‘게걸스러운 지상(地上)’이 됩니다. 그 분이 처해 있던 ‘비현실성의 늪’이 혹 이러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비조나리는 리얼리티의 곤고(困苦)를 처절하게 경험하는데서 출현합니다. 그러므로 휴머니티를 지니지 않은 비조나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비조나리가 스스로 자기의 비전을 실현하는 리얼리스트가 되어가면서 그 처음에서 일탈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비현실적인 비전과 비현실적인 실제의 간극 사이에서 자기를 상실하고 오직 ‘절대’로 개념화된 디비니티로 자기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통일교의 문선명 총재만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의 문화현상의 구조가 아예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이 계기에서 종교학이 직면하는 과제는 ‘신의 인간성과 인간의 신성’이라는 주제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시도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한 비조나리의 서거에 깊은 애도를 표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정진홍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mute93@daum.net
주요저서로《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 종교담론의 지성적 공간을 위하여》,《열림과 닫힘: 인문학적 상상을 통한종
교문화 읽기》,《경험과 기억-종교문화의 틈 읽기》등이 있다.
* 편집자주. 문선명 선생의 업적을 되새겨보기 위해 본 연구소에서는 신종교 학회 부회장이면서 통일교 내
부에 계시는 김항제 선생 글(226호)과 본 연구소의 이사장님이신 정진홍 선생의 글을 지속 연재하고 있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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