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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의 꿈과 모순: 아네사키 마사하루를 되묻다

2013.2.26


“종교학은 인간이 발전시킬 마지막 학문으로서 세상의 모습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서구 종교학의 아버지 막스 뮐러의 낭만적인 꿈은 어쩌면 빗나간 예언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일본종교학의 창시자 아네사키 마사하루(姉崎正治, 1873-1949)를 되묻는 자리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 있다. 아네사키는 지극히 다면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비롯하여 태평양전쟁과 패전에 이르기까지 근대일본이 치룬 대외전쟁과 식민주의 및 군부파시즘을 모두 경험하면서, 메이지유신 이후의 압축적인 근대화와 근대국민국가 형성 및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국가신도체제에 내포된 제모순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극복하고자 인격주의와 이상주의에 바탕을 둔 인문학적 종교학자, 신비주의적 신앙인, 역동적인 종교운동가(삼교회동 주도자, 귀일협회 간사), 낭만주의적 문인, 현실참여적 강연자, 평화주의적 국제활동가, 혹은 낙관적 정치가(귀족원[상원] 의원 역임)이자 관변학자(종교제도조사회 위원, 조선총독부 임시교육조사위원회 위원 등 역임)로서 평생을 바쳤다. 2,30대 청년기에 비평계의 총아로 등장하고 도쿄제국대학 교수가 된 후 탁월한 어학력을 바탕으로 놀랄 만큼 생산적인 저술활동과 열정적인 조직활동을 널리 국내외적으로 전개하면서 괴력적인 동선을 남긴 아네사키를 되묻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는 정부의 명에 의한 독일유학(1903-5년), 칸자금에 의한 세계일주여행(1907-8년), <일본문학과 생활> 강좌를 담당했던 하버드대학 체재(1913-15년), 국제연맹 국제학예협력위원으로서의 활동(1926-39년)을 포함하여 14차례나 서구행을 하는 등 근대일본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국제인이었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국제인 아네사키가 황실에 봉사하는 교토의 가문에서 태어나 생애에 걸쳐 경건한 천황숭배자이자 국체신봉자로 살았고, 30대 초반에는 열성적인 니치렌 신앙자, 40대에는 쇼토쿠태자 신앙자(양자 모두 국가주의적 성향과 관계가 깊다)가 된 내셔널리스트였다는 사실은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서 우리에게 일면 ‘모순의 상상력’을 요구한다. 그것은 종교(학)의 모순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일찍이 <비교종교학회>를 창립(1896년)하고 일본신화학의 원년(1899년)을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1905년 도쿄제국대학에 최초로 정규 종교학 강좌를 개설하고 1930년 초대 <일본종교학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던 아네사키는, 평생에 걸쳐 단행본만 치더라도 일본 종교학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저작 『종교학개론』(1900)을 비롯하여 인도종교사, 불교사, 기리시탄사 등의 개별종교연구 뿐만 아니라 시대적 흐름에 조응하는 다양한 형태의 문화비평적 평론집(종교론) 및 다수의 영어 저작과 번역서(가령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40여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와 같은 아네사키 종교학은 그의 생애가 그러하듯이 본질주의적, 심리주의적, 인격주의적, 인본주의적, 신비주의적, 형이상학적, 낭만주의적, 이상주의적, 개인을 매개로 하는 공동체주의적, 문화비평적, 국민교화적, 도덕주의적, 규범적 성격 등이 혼재되어 있어 매우 복합적이다.

 

패전전 일본사회를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힐 만한 종교학자 아네사키 안에는 모순되는 내셔널리즘적 측면과 국제주의자적 측면이 함께 병존하고 있었다. 물론 종교학자로서 아네사키가 가졌던 학문에 대한 열정의 순수성을 의심할 수 없듯이, 국제인으로서 평화를 위한 그의 동기적 순수성과 내셔널리스트로서 그의 천황과 일본에 대한 사랑의 순수성 자체를 의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런 그의 순수한 ‘마코토’(誠)는 언제라도 패권적 식민주의 혹은 파시스트적 국가주의의 은폐막으로 전화될 수 있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런 모순의 문제는 비단 아네사키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양세계의 압력 하에서 근대일본사회가 어떻게 국가적 아이덴티티를 확립했는가, 그리고 그런 일본사회 속에서 국가와 개인이 어떤 형태로 결부되어 있었는가를 규명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아네사키는 이런 문제 앞에서 종교를 해결의 키로 삼았다. 주지하다시피 릴리지온의 번역어인 종교라는 말이 오늘날처럼 개인의 내면과 관련된 비합리적 영역을 의미하게 된 데에는 아네사키가 일본에 도입한 종교학이 큰 역할을 했다. 그 후 니치렌 신앙과 쇼토쿠태자 신앙에 경도되어 간 아네사키는 종교(학)에 기대어 일본이라는 국민국가의 확립 및 동서양의 충돌이 초래한 국제적 혼란을 극복하고 정신적 자각에 토대를 둔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꾼 것은 혹 ‘모순의 꿈’이 아니었을까? 인간은 안팎으로 무수한 모순을 끌어안고 사는 존재이므로 모순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 모순을 자각하느냐 아니면 무자각적이냐 하는 점에 있다. 나아가 자각적이라 하더라도 더 큰 문제는 자신의 모순을 변명하고 정당화하거나, 아니면 그 모순을 외화시켜 타자에게 투사할 때 생겨난다. 이럴 때 우리는 허위적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기 십상이다. 특히 근대일본에는 이런 이데올로기에 침윤된 지식인의 사례가 많이 있다. 아네사키도 예외가 아니다. 『독일인의 사랑』에서 “누가 어린 시절의 신비를 앗아간 것일까”라고 회상하던 막스 뮐러가 그러했듯이, 어린 시절의 향수를 잃어버리지 않고자 평생 신비를 끌어안은 채 종교와 종교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꿈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그였던 만큼 참을 수 없는 모순에 대해 끝까지 낙관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일까? ‘꿈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박규태_
한양대학교
chat0113@daum.net
최근저서로 <<현대일본의 전통문화>>,<<국학과 일본주의:일본 보수주의의 원류>>,<<일본 '국체' 내셔널리즘의 원형>>등이 있으며, 최근논문으로 <현대일본종교와‘마음’(心)의 문제-‘고코로나오시’와 심리통어기법에서 마인드컨트롤까지->,<모토오리 노리나가의 모노노아와레론 재고: 감성적 인식론의 관점에서>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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