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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437호-장애인, 인간승리와 비정상의 이름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6. 10. 13. 16:27

장애인, 인간승리와 비정상의 이름

 



 

 

newsletter No.437 2016/9/27

 

 

 

 

시원치 않은 성적과 국내외적 사건들로 인해서 리우 하계 올림픽이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스포츠 내셔널리즘의 향연 속에서 비인기 종목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 이야기도 이전 올림픽 때보다 적었던 것 같다. 해당 종목들의 성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거대한 스포츠 이벤트 중에서 가장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은 비장애인들의 하계 올림픽 이후에 치러지는 장애인들의 올림픽인 패럴림픽이다. 국가 대항전이 이렇게 주목받지 못하는 스포츠 빅이벤트도 없을 것이다.

 

 

패럴림픽은 언론에 거의 다뤄지지 않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 조명을 받기도 한다. 장애인이 상상할 수 없는 역경을 딛고 금메달을 딴 경우나 금메달은 따지 않았더라도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보여준 경우이다. 물론 그러한 관심이 비장애인 올림픽의 스타플레이어에게 보이는 관심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이긴 하다. 패럴림픽에서 스포츠 스타가 탄생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패럴림픽 기간 중 우리나라 선수가 아니고 해당 종목의 우승 선수가 아님에도 언론의 주목을 받은 인물이 있었다. 그는 바로 양 팔이 없이 입으로 라켓을 휘두르는 탁구선수인 이브라임 하마투(이집트)였다. 그는 어렸을 때 기차사고로 양 팔을 잃었지만 탁구를 통해서 세상에 다시 설 수 있었고, 그 도전이 이어져 패럴림픽에도 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례는 역경을 극복한 인간승리의 드라마로서 주목될 뿐이지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것은 아니다.

 

 

패럴림픽 기간, 우리는 추석 명절을 맞았다. 비장애인들은 명절 대이동으로 부산하였지만 장애인들은 명절 대이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장애인 이동권을 위한 시위에 나서야 했다. 그러고 보면 고속버스 중에 저상버스를 본 기억이 없다.

 

 

장애인의 시위는 언젠가부터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진행하는 이동권 시위는 몇 해째 이어져 오는 듯 하고, 광화문 지하철 역사에는 장기간 장애등급제-의무부양제 폐지를 내건 시위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장애인들의 시위는 더 처절해 보인다. 힘든 몸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애를 쓰는데, 정작 사람들은 별 관심을 갖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도 보았듯이 장애인들이 주목을 받기 위해서는 보통 사람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여 장애를 극복하는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보여주어야 한다. 보통의 경우 그들은 비정상의 낙인 하에서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에서 비정상에 위치한 대상은 순수의 상징성을 획득하지 않으면 배제되기 마련이기 때문에 일반인이라고 자임하는 비장애인들은 장애인들을 찬사와 무시로만 대하게 되는 듯하다. 경계나 경계 밖의 인물, 소위 소수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이러한 상징 역학의 구도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

 

 

보통의 인간으로서 장애인을 위치시키고, 비장애인과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게 하는 활동은 그래서 묘하게도 집단적 신비의 감각을 일깨우는 것 같다. 노들장애인야간학교(‘노들야학’)에 참여한 어느 활동가는 장애인 교육과 장애인 차별 철폐 운동의 최전선이었던 노들의 활동을 마약이고 종교이고 연애였다고 술회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 그릇된 세계에 대한 개정의 열망이 그러한 활동의 근간을 이룬다. 올바른 세계로의 지향은 기성 세계에 대한 저항이다. 그리고 해방의 몸짓이 된다. 그 길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만 공통된 꿈을 가진 그 소수의 사람들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유대감을 맛보게 되는 것 같다.

 

 

소수는 쉽게 비정상으로 표상되는데, 그것이 정상의 지위를 얻게 하는 것은 단순한 저항이 될 수 없는 것 같다. 새로운 상상력의 실험이 감행되어야 하고, 그것이 일상화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소수의 반란이 다수에게 새로운 세계의 체험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대체로 그것은 좌절적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역사가 말해주듯이 말이다.

 

 

그런데 장애는 인간의 일생에 놓고 대입해보면, 자명하게 소수를 분리시킬 수 없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장애라는 것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걸을 수 없다. 많은 이들이 휠체어에 몸을 실어 인생의 석양을 바라보게 된다. 장애의 보편화는 시간의 문제인 것이다. 몸으로만 보면 그렇지만 정신으로까지 확장시키면 장애는 훨씬 우리 가까이로 다가온다.

 

 

장애의 확장은 실상 우리로 하여금 그 고통에 공감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함께고통 받을 수 있다면 저항이 해방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롭고 아름다운 유대감이 해방으로 인도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심형준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종교 개념의 적용과 해석에 대한 연구>, <섹슈얼리티의 성스러움: 금기 너머의 더럽고 위험한 성스러움과 정상(正常) 섹슈얼리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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