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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가 타는 가을날의 애도
newsletter No.439 2016/10/11
삶 속에 죽음이 스멀스멀 똬리를 틀다가 얼마나 끈질기게 삶을 옥죄이는지 숨을 막혀오던 그런 순간, 생생히 뵈었던 분들의 부고가 한꺼번에 너무도 갑작스럽게 들려왔다. 찾아뵙고 마지막 인사를 드려도, 그조차 여의치 못했을 땐 더욱더 마음이 무거웠다.
맑은 가을 날 포도나무 가지처럼 말라 타들어가다가 마지막 숨을 내쉬셨을 그 분들께, 혹은 갑작스런 이별에 마음이 엉거주춤 어쩔 줄 모르는 살아있는 이들에게 쓸쓸해서 차마 드리지 못한 인사와 깊은 애도로 허수경의 시 한편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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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삶과 죽음의 사이에는 어떻습니까
어느 해 포도나무는 숨을 멈추었습니다
사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살았습니다
우리는 건강보험도 없이 늙었습니다
너덜너덜 목 없는 빨래처럼 말라갔습니다
알아볼 수 있어 너무나 사무치던 몇몇 얼굴이 우리의 시간이었습니까
내가 당신을 죽였다면 나는 살아 있습니까
어느 날 창공을 올려다보면서 터뜨릴 울분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림자를 뒤에 두고 상처뿐인 발이 혼자 가고 있는 걸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포도나무의 시간은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습니까
그 시간을 우리는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이라고 부릅니까
지금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무엇으로 불립니까
정거장에서 이별을 하던 두 별 사이도 죽음과 삶만이 있습니까
지금 타오르는 저 불길은 무덤입니까 술 없는 음복입니까
그걸 알아볼 수 없어서 우리 삶은 초라합니까
가을달이 지고 있습니다
(허수경, <포도나무를 태우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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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럽고 붉은 포도송이로 풍요와 생명을 주던 포도나무는 마른 가을날 부석부석해지고 너덜너덜 말라가다가 숨이 멈추었다. 어쩌면 서는 것과 앉는 것, 삶과 죽음 사이에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우리의 초라한 삶을 위하여. 포도나무를 태우는 이 시간 삶은 결국 끝나지 않을, 끝날 수 없는 애도로서의 삶이라는 진실을 드러낸다.
프로이트는 종교, 특히 유일신교를 애도의 형식으로 보았다. 폭력적인 원초적 아버지를 죽인 아들들의 죄책감이 아버지를 초월적 존재로 신격화하고 초자아의 형식으로 내면화하여 영원히 아버지를 기억하고 애도함으로써 죄의식을 해소하는 자기징벌의 의례가 곧 종교이고, 그러한 죄의식을 해소하려한 심리적 메커니즘이 종교의 뿌리 깊은 원천이라고 본 것이다.
이 유명한 프로이트의 판타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종교 기원설로서의 가치보다 삶과 죽음, 서있는 것과 앉아있는 것 사이에서, 과거와 미래처럼 선명하게 정의되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현재라는 어정쩡한 순간을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로서 여전히 호소력이 있다. 그것은 종교의 진실도 인생의 진실도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무엇, 세대와 세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로를 삼키는 진실에 대한 우화가 아닐까?
안연희_
선문대학교 연구교수
논문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원죄론의 형성과 그 종교사적 의미>, <“섹스 앤 더 시티”: 섹슈얼리티, 몸, 쾌락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 다시 읽기> 등이 있고, 저서로 <<문명 밖으로>>(공저), <<문명의 교류와 충돌>>(공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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