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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자리, 종교의 자리
newsletter No.435 2016/9/13
다큐멘터리 <그 노래를 기억하세요>(Alive Inside : A Story of Music and Memory, 2014) 속 치매 노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살아오면서 들었던 음악들에는 온몸으로 반응한다. 그들은 음악을 들으며 한 때 자신의 감정을 동요시키고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던 순간을 기억해낸다. 비록 그 음악의 이름도, 그 음악을 듣던 장소와 시간도 명확히 기억나지 않을지 몰라도, 그 음악에 반응했던 몸과 마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신경의학자 올리버 색스(Oliver Sacks, 1933-2015)는 저서 <뮤지코필리아> (Musicophilia, 2007)에서, 신경질환을 겪는 환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음악과 연결되는 사례들을 소개한다. 그중 어떤이는 청력을 잃어가면서 오로지 찬송가 환청만 계속 듣게되기도 했고, 운동이상증에 걸린 어떤 이는 근육의 문제 때문에, 마치 유대인들이 몸을 움직이며 기도문을 읽듯이 박자에 맞춰 몸을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에는 자신도 모르게 히브리어 기도문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또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단지 유대인들이 기도문을 낭송할 때 사용하는 것과 유사한, 일정한 리듬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되풀이하는 한 치매 노인에게, 그가 반복하는 리듬에 맞춰 똑같은 리듬으로 말을 거니, 그 순간만큼은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그 노래를 기억하세요>와 올리버 색스의 책은, 음악이 우리의 몸과 감각에 미치는 독특하고 강력한 힘을 새삼 깨닫게 해주며, 또한 그 작용 방식에 대해 질문하게 만든다. 음악은 어떻게 해서 우리의 몸과 마음 속에 들어와 어디에 자리잡게 되는 것일까.
음악을 묘사하는 단어들 중에서는 ‘신비’, ‘마법’, ‘영혼의 울림’ 등 종교적인 것과 연관된 단어들이 유난히 많다. 그리스 신화 속 최고의 음악가인 오르페우스는 ‘주술사(agurteuonta)’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플라톤으로부터 플로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마르실리오 피치노에 이르기까지 음악은 신적인 하르모니아와 관련지어 이야기되기도 했다. 또한 루돌프 오토는 음악이 우리의 마음 속에 온갖 감정의 폭풍을 일으키지만, 이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성스러움’ 처럼, 우리의 밖에 있는 ‘전혀 다른 것’ 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논의에서 주술이든, 신적인 하르모니아든 혹은 ‘전혀 다른 것’이든 간에, 음악은 외부의 무엇인가가 내면 속으로 들어와 일으키는 변화로서 파악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지 살펴보는 것은, 음악이라는 대상 자체의 속성, 그리고 음악에 반응하는 우리 몸 속의 무엇에 대한 관심 뿐만 아니라, 음악과 그것을 듣는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혹은 그 둘을 둘러싸고 있는 시공간, 그리고 그 시공간 속에서의 관계에 대한 관심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음악은 하나의 시공간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시공간들을 뒤섞는다. 이는 앞선 든 예처럼 이전에 들어 본 과거의 음악들이 과거의 어느 시점과 장소를 소환한다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음악을 듣는 순간 이미, 음악을 만든 이의 시공간과 연주하는 이의 시공간 그리고 듣는 사람의 시공간이 공존하는 경험이 이뤄진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음악이 있는 곳에서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고정성은 흔들리고 불안해지며 균열이 생긴다. 현대의 음악가들 중에는 이러한 음악의 이질적 시간경험을 독특한 방식으로 극대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러시아의 작곡가 알프레드 슈니트케(Alfred Schnittke, 1934-1998)는 서로 다른 시간대의 음악과 기법을 연결시키는 일종의 음악적 꼴라쥬 작업을 통해 이질적인 시간 경험이라는 음악의 속성을 더 부각시키며, 에스토니아의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 (Arvo Pärt, 1935- )는 단순함과 침묵을 통해 다가올 음에 대한 기대, 즉 음악적 현재와 미래의 시간 사이에 균열을 일으키며 이질적인 시간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음악은 이곳과 저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영국의 작곡가 존 태브너(John Tavener, 1944-2013)는 자신의 음악이 테메노스(temenos), 즉 성스러운 장소를 만들어낸다고 말했는데, 이 때 테메노스는 단순히 성스러운 음악이 울려퍼지는 공간이 아니라, 음악 자체를 뜻하는 말이다. 즉 음악이 장소가 되고, 음악을 듣는다는 행위는 그 장소 안에 들어가 그 상황에 전적으로 참여하는 일이며, 음악이라는 장소를 구성하는 이질적인 시간의 층위들을 모두 한꺼번에 경험하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20세기 종교학에서 음악이 진지하게 논의된 적은 드물다. 종교연구의 텍스트 중심적 태도를 비판하며 종교의 감각적 물질적 차원에 대한 주목을 요청한 ‘물(질)적 종교 (material religion)’ 연구에서도 음악은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물(질)적 종교의 주요 용어들 (Key Terms in Material Religion)>에는 음악 대신 ‘소리(Sound)’ 라는 항목이 선택되었다. 분명 종교의 소리가 만들어내는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에 주목하고, ‘소리’의 경험이 어떻게 생리학적인 것만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으로 구축되는 것인지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러한 ‘소리’에 대한 종교학적 논의 속에서 ‘음악’ 역시 따로 다뤄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음악이 이질적인 시공간을 한꺼번에 경험하게 해주며, 지극히 추상적인 것 속에서 지극히 개별적인 것들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만약 우리가 음악의 자리에 대해 무언가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종교의 자리에 대해서도 이전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말해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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