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과 함께’를 보고나서
news letter No.507 2018/1/30
요즘 ‘신과 함께: 죄와 벌’이란 영화가 14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영화를 보면, 저승사자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흔히 저승사자하면 죽은 자의 안타까운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죽은 자를 저승으로 잡아가는 냉혹한 존재를 떠올린다. 이와 달리 이 영화에서 저승사자는 죽은 자를 변호하고 죽은 자의 현실에 개입하는 대단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영화에서는 그 개입이 지나쳐서 ‘저승사자’가 아니라 ‘저승 구원자’라고 여겨질 정도이다.
영화에서는 저승사자의 인간 삶에 대한 개입이 지나치긴 해도, 한국 민간의 저승사자 역시 단지 죽은 자를 저승으로 끌고 가기만 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저승사자는 인간에게 반응하고 소통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이는 상가에서 차리는 사자밥을 통해 쉽게 짐작된다. 저승사자에게 음식을 제공한다는 것은 그 음식을 받는 저승사자가 음식을 매체로 소통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전제한다.
저승사자가 인간과 소통 가능한 존재라는 생각은 죽음 관련 무속신화나 굿에서 잘 나타난다. 저승사자는 죽은 자를 저승으로 잡아가려고 이승으로 오지만, 죽은 자의 가족이 마련한 정성을 받고 죽은 자를 잡아가지 못하거나 말과 같은 짐승을 대신 잡아가기도 하며, 산 자에게 저승길을 떠나는 죽은 자의 안타까운 심정을 전해주기도 한다. 또한 저승사자는 저승으로 데려가야 할 죽은 자를 착각해 다른 사람을 잘못 잡아가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는데, 이 역시 저승사자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저승사자의 이런 모습은 죽음의 세계와 인간 삶의 현실 세계가 철저하게 단절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만약 두 세계가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다면 죽음의 세계의 존재인 저승사자와 인간의 소통은 불가능할 것이다. 죽음 관련 무속신화를 보면, 비록 실패로 귀결되지만, 저승사자를 움직이는 것은 물론 다른 방법을 통해서라도 가족의 죽음을 되돌리고자 하는 시도가 이뤄진다. 이는 죽음의 세계, 죽음의 문제가 인간이 어찌해볼 수 없는 영역이기 보다는 인간이 소통하고 개입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말한다, 한편으로는 저승과 이승은 달라서 저승은 죽은 자의 세계라는 관념이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지만, 조상제사나 굿을 통해 죽은 자와 산자가 만날 수 있듯이 죽음의 세계는 인간 삶의 세계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소통이 가능한 세계로 여겨진다.
그런데 죽음의 세계는 현실 세계와 단순히 소통하는데 그치지 않고 현실 삶의 문제를 바로잡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는 영역으로 나타난다. ‘신과 함께’를 보면 세 명의 저승사자가 나오는데, 그중 우두머리가 강림차사이다. 제주도 무속에서 강림은 본래 인간이었는데, 저승세계의 염라대왕을 이승으로 데려오는 역할을 맡았다가 저승차사가 된다. 강림차사 이야기에 의하면, 강림이 염라대왕을 이승으로 데려오는 이유는 현실 세계인 이승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이승에 내려온 염라대왕은 그 문재를 해결하고 강림을 저승차사로 발탁해 저승으로 되돌아간다. 현실 삶의 문제를 죽음의 세계인 저승의 염라대왕이 해결하는 것이다.
무속의 대표적인 신화로 바리공주 신화를 들 수 있다. 바리공주 이야기의 큰 틀은 강림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바리공주가 자기 부모를 살리기 위해 향하는 곳은 바로 죽음의 세계인 저승이다.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있는 생명수와 생명의 꽃이 자라는 곳이 저승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무속신화에서 죽음의 세계는 죽음의 세계이면서 아울러 삶의 세계이기도 하다.
긴 시간 동안 한국사회에서 죽음이 삶을 직시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가 되는 것은 거의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현실로 자리잡고 말았다. 죽음에 직면하고서야 애써 눈감아왔던 삶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제서야 해결하고자 한다. 이제 그러한 상황이 더 이상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비현실적인 바램일까?
이용범_
안동대학교 인문대 민속학과 교수
최근 논문으로 <일제의 무속 규제정책과 무속의 변화: 매일신보와 동아일보 기사를 중심으로>, <한국무속과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비교: 접신(接神)체험과 신(神)개념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