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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33호-죽은 나의 몸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8. 7. 31. 22:07

                                          죽은 나의 몸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news  letter No.533 2018/7/31                  
 


 

 

 


       경기도 어느 지역의 노인종합복지관에서 “죽음 준비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스태프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게 된 나는 연령상으로 결코 ‘노인’일 수 없었지만, 내 자신과 지인들의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개인으로서는 그곳의 어느 누구와도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죽음은 노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죽음은 노소(老少)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때문이다. 즉, 죽음은 노인이 되어야만 비로소 당사자가 되는 특수한 사건이 아니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죽을 수 있고, 불현 듯 다른 사람의 죽음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점에서 모두가 죽음의 잠재적 당사자인 것이다. 물론 ‘웰다잉(well-dying)’ 담론의 연장선에서 등장하는 호스피스, 완화의료, 존엄사 등에 관한 논의가 특히 노인들과 환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웰다잉’ 관련 이슈들은 모두 사회 전반의 공론화와 심도 있는 토론을 필요로 하는 공공의 문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음 이후의 시신 처리’를 다루는 장법(葬法)의 이슈를 포괄할 때, 죽음은 이 사회구성원 모두가 함께 겪어내야 하는 사회적 삶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개인들에게 죽음은 여전히 낯설다. 죽어가는 몸이나 이미 죽은 몸을 직접 보는 경험도 일상적이지 않다. 특히 자신이 살아온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적어진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대개 병원이 구획해 놓은 특수한 시공간의 통제 안에 놓인 죽음과 주검을 경험한다. 오늘날 죽음은 의사의 선언을 통해 실현되고, 주검의 처리는 현대의 관습, 제도, 각종 인프라를 이용해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죽음은 생전에 간접적으로만 지각하고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이지만,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타인의 주검을 통한 죽음의 간접 경험조차 아무에게나 허용되지 않는다. 죽음이 익숙해질 수 있는 조건은 현실에서 쉽게 제공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여전히 모두의 문제다. 사회 곳곳에서 ‘죽음 준비 프로그램’을 통해 낯선 죽음을 익숙한 일상으로 끌어들이려는 활동이 전개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상황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죽음과 주검이 개인의 일상경험과 멀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회가 불행한 사고를 많이 겪고 있지 않다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의 전장(戰場)에 노출되었던 세대 가운데에는 일상에서 시신이 적절히 처리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는 것을 직접 보거나 곳곳에서 부패해가는 주검이 뿜어내는 냄새를 맡았을 때의 당혹스러움과 끔찍함을 아직도 기억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죽음과 주검이 개인들의 일상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의 삶이 안정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조금 더 공공의 물적 기반에 초점을 두고 말하자면, 이는 매년 축적되는 사망자 수에 상응하는 시신 처리 능력을 한국 사회가 어떻게든 유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통계에 따르면, 2017년 한국의 사망자 수는 28만 5천 명을 상회한다. 베이비붐 세대의 노령화와 관련해 2020년부터 더욱 가속화될 한국 사회의 고령화는 앞으로 당분간 더 많은 시신처리의 물적 기반과 문화적 기반을 요청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예측은 이미 전국 화장률의 변화를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1994년에 전국적으로 20.5%에 불과하던 화장률이 2016년에는 82.7%로 조사된 통계의 추이는 최근 들어 매장(埋葬)보다 화장(火葬)을 선택하는 유족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매장지의 절대적 부족이라는 물적 조건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화장이라는 시신 처리 방식의 정당성에 대한 문화적 수용 없이는 나타나기 어려운 현상이다. 이러한 화장의 선호는 전국적으로 화장시설의 설치와 수급을 증가시키고 있으며, 새로운 방식의 자연장지와 봉안시설의 등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시신의 처리는 엄격한 법적 규제를 받는 사회적 행동인 만큼 이러한 변화는 법률상의 근거를 마련하는 과정을 동반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법령은 장법의 문화적 의미에도 영향을 미친다.

       2015년에 개정된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시신’은 임신 4개월 이후에 죽은 태아를 포함하는 인간의 시체를 의미하며, 이 시신을 장사지내는 방식으로서 매장과 화장 외에도 자연장(自然葬)을 별도로 규정하고 있다. 이때 ‘자연장’이란 화장한 유골의 골분을 수목, 화초, 잔디 등의 밑이나 주변에 묻어 장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현대의 매장이나 화장 자체는 ‘자연장’일 수 없지만, 특정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화장과 매장의 하이브리드(hybrid)는 자연장이 될 수 있다. 또, 자연장이 가능한 구역을 ‘자연장지’라고 부르며, 산림에 조성하는 자연장지를 ‘수목장림’이라고 부른다.

       즉, 자연장은 가장 인위적으로 육탈의 시간을 급격히 단축시키는 화장과, 유골을 땅에 묻어 자연의 침탈을 인위적으로 지연시키는 매장을 결합하면서, 화장으로 인해 급속하게 육탈된 유골에 수목, 화초, 잔디의 자연적 리듬을 투영하려는 일종의 이중장 형태로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른바 ‘자연장’의 등장은 현대 한국 사회의 주도적인 시신 처리 방식 이면에 스며들어있는 사람들의 고민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무엇보다 화장률의 급격한 증가는 일종의 ‘편의주의’를 배제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편의주의적 선택에 따르는 미안(未安)과 의미(意味)의 긴장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그러한 긴장은 다양한 행동을 낳을 수 있다. 예컨대, 고가의 봉안시설을 구축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수목장림과 같은 자연장지를 조성하고 홍보하는 국가적 정책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자연장’ 개념의 등장은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름의 적합성을 갖게 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어떤 행동이든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향유하게 될 상징적 의미는 하나로 고정되지 않을 것이다.

       요즘 나는 과연 누가 내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게 될지가 궁금하다. 생전의 내 의견이 최대한 존중되길 바라지만, 결국 그 일의 판단과 실행이 살아있는 자들의 몫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나의 죽은 몸은 살아있는 자들에게 “자, 어떻게 할 것인가?”를 소리 없이 묻게 될 것이다.

      

 


구형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전문연구원
논문으로 <민속신앙의 인지적 기반에 관한 연구: 강우의례를 중심으로>, <멍청한 이성: 왜 불합리한 믿음이 자연스러운가>, <‘인간학적 종교연구 2.0’을 위한 시론: ‘표상역학’의 인간학적 자연주의를 참고하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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