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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42호-사물 기호학 단상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0. 9. 8. 17:51

사물 기호학 단상


newsletter No.642 2020/9/8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자연을 비롯한 비인간 세계의 각종 기호(sign)를 해독하는 일은 삶을 영위해 나가는 과정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예컨대, 동물의 출현과 몸짓, 기상의 흐름, 천체의 움직임 등을 포착하고 그것이 지닌 의미를 해독하는 일이 그런 것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풍수지리설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지형지물의 분포나 형태 등을 근거로 삼아서 죽은 자를 포함한 인간의 삶에 가장 적합한 장소를 분별하고 물색하는 일이 목표였을 것이다. 인류학자 웹 킨(Webb Keane)의 말을 빌려 말한다면, 이와 같은 비인간 세계가 자아내는 여러 움직임이나 징후를 넓은 의미의 기호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사회일수록 언어와 숫자 같은 인간의 기호뿐만 아니라, 비인간 세계에서 나타나는 기호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간의 지식 체계 중에서 비인간 세계의 기호에 대한 지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비인간 세계의 다양한 기호들은 종교를 구성하는 데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점복만 하더라도 물질적 기호가 중추적인 기능을 담당한다. 점을 치기 위하여 살해한 동물의 내장에서 특별한 징후를 발견한다든지, 갑골 점복처럼 동물의 뼈 표면에 복조(卜兆)가 출현하는 현상은 종교 전문가의 해독을 기다리는 기호이다. 이러한 점복의 기호들은 늘 물질적인 형태를 띠고 출현하기 마련이다. 신성한 세계로부터 인간의 세계로 전달된 메시지인 점복의 기호가 물질을 매개로 출현하는 현상은 흥미롭다. 비가시적인 신의 메시지가 가시화되는 현상은 적어도 나에게는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기왕에 점복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상나라 갑골문을 언급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듯싶다. 갑골문에는 질병과 관련된 정보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 질병의 원인과 치료에 관한 내용이어서, 당시 사람들의 질병 인식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질병을 일으키는 배후에는 조상신을 비롯한 다양한 신들이 존재한다고 믿고, 그 치유 방법으로서 이들에 대한 희생제의가 제시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렇다면 왜 신들은 인간에게 질병이란 고통을 주었을까. 갑골문에 분명하게 예시된 경우를 찾기는 어렵지만, 신과 인간의 관계가 정상 궤도를 달리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 신호로 받아들여도 큰 문제는 없다. 물론 신과 인간의 관계를 망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다. 한마디로 질병은 인간의 도덕적 판단의 대상으로서 수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상나라의 질병 관념을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의학(medicine)’과 곧바로 연결하는 것은 곤란하다. 근대 ‘의학’은 병인과 그에 대한 대처 방법을 인간의 도덕적 행위와 무관한 영역에서 찾는 데서 성립하였다. 근대 의학의 눈부신 성과는 질병을 질병 자체로 보는 데서 얻은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근대 의학의 영향이 강력하게 작용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속성은 질병을 하나의 기호로 보고 그것이 지닌 의미를 해독하려는 노력을 포기한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서, 오늘날에도 전통적인 질병 관념이 여전히 작동하는 지대로서 종교를 꼽을 수 있다. 인류가 겪는 온갖 질병이나 재앙을 인간이 저지른 오류에 신이 가한 형벌이라고 말하거나, 적어도 그보다 더 큰 재앙을 내리기 직전의 서막으로 해석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그런데 유심히 생각해 보면, 이러한 흔적이 반드시 종교의 영역에만 남아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가령 인류가 겪는 환경적 위기나 전염병 등의 현상을 비인간적 세계에서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는 대신, 경제개발로 인한 자연의 착취나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필연적 결과로 해석하는 것은 그러한 태도의 연장선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다만 후자의 경우는 종교적 태도보다는 좀 더 설득력 있고 타당한 의론으로서 수용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별성을 지닌다. 하지만, 인간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현상을 인간의 도덕적 오류와 결부 짓는다는 점에서 양자의 구조적인 동일성이 엿보인다. 인간은 신이건 자연이건 자신을 둘러싼 비인간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위치를 확인하고, 어떻게 이러한 존재들과 생존에 필요하고 적합한 방식으로 관계를 형성해나갈지를 고심한다.

최근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온 코로나 바이러스는 그 자체가 하나의 강력한 미디어가 되어 인간들 간의 관계를 예전에 없던 방식으로 해체하고 재형성하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 바이러스의 움직임과 작용력은 워낙 예측 불허라서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기호인지 온전한 해독을 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 바이러스 기호를 자기들 나름대로 해독하여 유통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예컨대 이 바이러스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용했던 ‘우한 바이러스’라는 명칭에는 특정 정치 세력의 입장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한국에서 코로나가 정치와 종교와 결합하여 소통되는 현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바이러스는 인간의 영역으로 들어와서 각종 수식어와 결합하여 소통을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 중요한 것은 바이러스에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이더라도 바이러스로서의 독자적 힘은 상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제아무리 권력이 세거나 카리스마 넘치는 종교 지도자라도 바이러스를 자기 체내로 들어오게 하는 순간 발병을 피할 수 없다. 바이러스와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맺는 것이 공동체 전체의 이익에 부합할지 그 정도와 범위를 찾는 일은 어려운 숙제임이 분명하다.

 

 







 


임현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최근의 논문으로 〈상왕조의 인간희생제의에 관한 연구: 전쟁, 도시, 위계를 중심으로〉, 〈西周 시기 신 · 인간 · 동물 범주에 관한 연구: 청동기 金文 및 문헌 자료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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