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격리를 마치고
newsletter No.643 2020/9/15
한국에 온지 두 주가 지났다. 드디어 자가격리를 마쳤다. 한 달여간의 삶은 마치 이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온 것 같은 내적, 외적인 변화와 함께 지나가고 또 마주하고 있다.
귀국하기 전, 인도에서는 한 달 내내 이사 준비를 했다. 한반도의 13배에 해당하는 땅덩어리를 가진 인도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직도 인도의 시골 마을에 가면, 다른 주에서 온 사람들은 철저히 이방인이다. 공동체 문화가 카스트 제도와 함께 깊은 역사 안에서 묻어온 인도인에게 다른 지역으로의 ‘이사’란, 살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배워 익혀야 하는 것과 같은 퍽 낯설은 일이다.
인도에서 국내선을 타고 델리까지 오기까지, 공항의 모습은 많이 달랐다. 나는 그간 수차례 출입국을 반복했지만, 이번의 공항은 그간 보아왔던 공항이 아니었다. 한국에 도착하기까지 열 번이 넘게 체온을 쟀다. 인도 국내선은 심지어 탑승권도 발급하지 않았다. 탑승객 스스로 온라인에서 체크를 해서 탑승권을 발급받은 자만이 비행기에 오를 수 있다. 사람들로 들어찼던 이전의 모습과 다르게 인도의 거리와 공항은 한산했다. 누가 감염되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거리에서는 마스크 쓴 사람들만 큰 눈을 번뜩거리며 지나다녔다. 공항에서는 여전히 큰 소리로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을 감싸 안은 긴장된 침묵은 더 무거웠다.
국내선 탑승에서 승객들은 마스크는 물론, 페이스 쉴드를 머리에 두르고 방호복을 입기도 했다. 승무원은 마치 우주 비행사처럼 옷을 입어 누가 누구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마치 미래 재난 영화에서 보는 인간 1, 2, 3번 등의 n번을 보는 듯했다. 탑승객들은 누구하고도 말하지 않았다. 옆에 앉은 사람이 재채기라도 하면, 나 역시 괜히 예민해졌다.
델리에서 인천에 오는 전세기 티켓 가격은 예전에 비해 3-4배가 높았다. 그래도 아시아나 항공 기내에는 핸드캐리 가방을 구겨 넣어야 할 정도로 비행기 전 석이 꽉 들어찼다. 그간 인도에 남아있던 한국인은 필사적으로 귀국하려고 했음을 그대로 느꼈다. 델리 공항 국제선 면세 구역의 절반은 문을 닫았다. 평소에 쇼핑을 즐기지 않던 나조차, 이 풍경은 생소했다. 마치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의 도시를 탈출하는 듯했다. 비행기 객실에서는 꽉 들어찬 공기로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출국 직전에 이사하느라, 며칠은 제대로 자지 못했기에 급기야 구토를 했다. 갇힌 실내에서 목도 간질간질하고 머리도 아프기 시작했다. 순간, ‘아... 코로나에 감염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사하면서 이삿짐 직원들의 모습이 떠올랐고 공항에서 손이 닿은 여러 가지의 내 모습이 스쳤다. 나는 마치 인천공항에 도착하기까지 죄를 저지르고 숨어 있는 범죄자와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결국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시작되는 열 체크와 증상 검사에서 나는 ‘유증상자’로 분류되어 공항에 남았다. 코로나 검사를 마치고 6~7시간 검역 구역에서 자리 하나 깔고 쭈그리고 누워 있으며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닐 거야, 이사하느라 힘들어서 그래.. 그래도 혹시 양성이면, 이곳에서 치료 받으면 되지.” 하며 스스로 위로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박사논문을 기어이 마쳐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귀국한 일이 과연 잘한 것인지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정작 걱정은 인도에 남은 가족이었다. ‘내가 양성이면, 같이 옮았을 텐데, 대체 그들은 어디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나.’ 생이별을 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인도에서 코로나로 사망하거나 코로나 사태로 병원에서 치료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지인들의 모습이 주르륵 스쳐 지나갔다. 음성 판정을 공항직원으로부터 듣는 순간, 긴장했던 숨이 순간 확 내려앉았다. ‘맥이 풀린다’는 말이 무엇인지 그대로 알 수 있었다. 공항에서 지정한 코로나 택시를 타고 드디어 격리 시설에 도착했다.
그날, 방문을 열고 창밖에 보이는 나무가 내가 두 주간 유일하게 마주하는 지구상의 생물이었다. 말 그대로 두 주간의 격리는 철저했다. 식사가 도착하는 시간에 유일하게 방문을 살며시 열고 복도의 공기와 접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고급 감옥’이다. 직원과의 소통은 철저히 내선전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시청에서는 한 박스의 구급품이 왔고, 정신 건강이 괜찮냐는 체크도 받았다. 아침저녁 열을 재고 보고했다. 하루는 핸드폰을 문 근처에서 받아 격리 지역을 벗어났다는 시청 직원의 연락을 받기도 했다. 직원들은 아침저녁으로 체크하고 물품을 제공했다. 지난 두 주는 그렇게 철저한 감시와 보호 안에서 지나갔다. 그러나 두 주간의 격리를 마칠 무렵이 되자, 코로나는 다시 급증했다. 내가 거주할 곳에서 확진자가 발생해서 전 건물을 소독한다는 소식을 듣자, 또다시 이 삶을 반복해서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몇 번의 삶을 거듭 윤회한 듯한 생각이 든다. 한국의 정치는 시끄러웠고, 귀국해서 반가웠던 지인들과의 소통에서는 또다시 마음의 장막이 쳐졌다. 이제 정말 시대가 바뀐 것 같다. 코로나 시대다. 한 인간의 경험이 단지 한 사람의 일이 아닌, 그가 속한 공동체의 역사 임에도 그 안에서 개개인은 자기 앞에서 일어나는 만 가지 세상 모습과 어떻게 소통하고 살아야 하는가를 공황 속에서 마주하는 ‘지금’이 지금을 산다.
최현주_
한국학중앙연구원, 종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