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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39호-제주도에서 신과 종교를 생각하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0. 8. 12. 00:58

제주도에서 신과 종교를 생각하다



newsletter No.639 2020/8/11

 




제주도다. 3000개의 당과 3000개의 절이 있다는 곳. 그곳에서 나고 자란 스님의 초청이 있어, 범패를 하는 스님 한 분, 조상님을 모시는 법사 한 분, 수묵을 치는 화가 한 분과 길동무가 되어 물을 건넜다.

한 시간 비행기 길이 짧다고 누가 그랬나. 하늘에서 내려다본 풍광이 바다로 바뀌고 나서도 십오 분여가 지나고서야 섬 북단의 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해남이나 강진에서 출항한 범선이 적게는 서너 척, 많게는 십여 척까지 열 지어 바람을 가르며 운이 좋으면 하루 꼬박, 그렇지 못할 땐 이틀을 걸려 도달한 뱃길이었다. 너울 파도에 일렁이는 불안한 눈빛들이 멀리서 서성이는 땅 모퉁이를 보았을 때의 그 초췌했을 안도감을 뜨겁게 느낀다. 제주시가 섬의 북단에 위치한 첫 번째 이유, 그렇게 달려온 사람들이 닻을 내려 처음으로 안착한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먼저 남쪽 끝 마라도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남쪽 끝이라지만 제주시로부터 정남으로 아래쪽은 아니다. 제주도 정남단인 서귀포항에서 서쪽으로 100리 길 거리에 모슬포가 있다. 제주시로부터는 남서 방향으로 있는 섬의 끝이다. 이 모슬포 항으로부터 다시 바다 건너 남쪽 11km 너머에 남북으로 길게 마라도가 누워 있다. 면적 0.3㎢에 둘레가 4km 남짓. 도보로 시간 반이면 섬을 한 바퀴 다 돌 수 있는 크기다. 나무도 없이 평평한 반석과 같은 섬에는 담수의 샘도 없어 사람이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주민의 기록은 1883년으로 소급된다. 모슬포 주민 일부가 이 때 비로소 마라도에 들어가 화전 농지를 개간했다던가. 원래는 숲이 울창했으나 이때부터 시작된 개척으로 지금과 같은 벌거숭이 반석이 되어버렸다던가. 그래도 빗물만으로 설마 사람이 상주했을까 싶은 황량한 환경이다. 지금은 해수를 담수로 바꾸어 사용한다지만.

흥미로운 것은 현재 이 자그마한 섬에 사찰과 성당과 교회가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쪽 해안의 기원정사는 너른 뜰에 세 길 높이는 족히 될 만한 새하얀 해수관음상이 바로 앞의 바다를 향해 서 있다. 하지만 사찰의 낮은 시멘트 건물은 퇴락한 채 버려진 듯 황폐하고 쓸쓸하다. 동쪽 해안에는 마라도성당이 있다. 탑 모양으로 둥글게 솟은 건물은 높이 십자가를 지고 내부는 환한 조명과 은은하게 울리는 녹음된 성가 소리로 지나가는 이의 신심을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섬의 한가운데에 마라도교회가 있다. 예수교장로회 소속으로 넓게 자리한 하얀색 단층 건물은 마당에 제주기독교백주년기념비와 순교자기념비를 세우고 운영되는 모양새다. 어쩐지 한국의 종교지형이 압축적으로 집약된 느낌이랄까. 이 기묘한 공존에 일행 한 분이 마라도모스크 건립의 제안을 주장한다. 우스갯소리만으로 들리지 않는다. 한국의 이슬람 인구는 성장하는 추세이니, 그것이 실현될 날이 멀지도 않겠다.

하지만 함께 한 법사님이 가던 걸음을 멈추는 곳곳에 이 섬을 지키는 토착의 신님들이 있다. 섬 북쪽의 선착장을 내리자마자 오른편 해안에 검은 현무암의 무더기로 벽을 쌓은 노천의 당은 할망당 일명 애기업개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래전 모슬포 해녀들이 이곳에 와 물질을 하다 식량이 다 떨어지자 꿈에서 지시하는 대로 보모 역할을 하던 여자아이인 애기업개를 두고 떠나 그 아이가 죽어 백골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자신들을 위해 희생한 애기업개를 위해 해녀들은 매년 이곳에서 제를 올린다고 하니, 애기업개는 해녀들의 수호신으로 좌정한 것이리라.

섬 서안의 둘레길을 따라 걷다보면 기원정사를 지나 남서변 해안에 또 하나의 기도처가 보인다. 역시 검은 현무암의 바위가 우뚝 솟아오른 지형 옆에 반반히 펼쳐진 돌반석이 어서 와 바위에 기도드리라고 손짓한다. 웅장하게 솟구친 바위의 형세 때문일까. 포근한 느낌의 할망당과는 달리 남성적인 신성성이 깃든 곳이라는 법사님의 설명이다. 그래서 이름도 장군바위다. 이는 무속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이름으로 용바위라고도 불리며, 일반인들은 신선바위라고도 한단다. 법사님을 따라 공수한 채 고개를 수그리니, 옆에서 나지막히 나를 위한 기도를 해 주신다. 섬에는 할망과 장군이 계시는 두 기도처 외에 동자의 내력이 깃든 동자바위도 있다고 하나, 정확한 위치는 찾지 못했다.

마라도는 오랫동안 제주도민들만의 장소이다가 1990년대 한 통신사의 그 유명한 “짜장면 시키신 분~” 광고로 전국적인 인지도를 갖게 되었다. 다만 그로 인해 짜장면이 맛있는 섬이라는 엉뚱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둘레길을 따라 즐비한 음식점 중에는 중식당이 적지 않게 포진해 있다. 모슬포에 집을 두고 상가 운영을 위해 섬으로 드나든다는 마라도 주민들은 할망과 장군께 자신들의 수호와 번영을 위해 기도드릴까. 아니면 저마다의 종교에 따라 사찰로 성당으로 또는 교회로 기도를 나갈까. 어쨌거나 부처님과 하느님은, 또 할망과 장군님과 미처 찾아뵙지 못한 동자까지도 언제나 섬을 지켜주실 것만 같다. 때로는 나처럼 지나가던 객의 안위까지도.

 

섬 속의 섬 마라도를 나와 서귀포 쪽 외돌개 옆 황우지 선녀탕을 지난다. 바닷가 돌무지 사이로 스며나온 담수가 못을 이룬 곳. 천혜의 헤엄터라며 관광객들이 성시를 이룬 이곳에서 법사님은 인적 드문 계절에 다시 와 기도를 드리겠노라며 발길을 돌린다. 그리고 서귀포시의 추사 유배지와 제주시 자연사박물관을 들렀다. 추사 만년의 서체가 제주 유배에서 완성되었다고들 이야기하지만, 이곳에서 추사는 과연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 그의 유배는 제주도민의 역사 문화에 어떤 환기가 되었을까. 자연사박물관에는 제주도의 진상품이라며 감귤과 공마(貢馬)의 봉진도가 모사되어 있다. 집집마다 재배되는 감귤을 정작 본토인들은 맛보지 못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에 슬픔이 인다.

자연사박물관 옆에 고, 양, 부, 세 성의 시조가 솟아오른 삼성혈이 있다. 세 명의 형제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저마다 나라를 세우고 사냥으로 백성을 다스리다 벽랑국 공주들과 혼인을 이루며 농경문화를 전수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 그러니 세 을나들은 국가의 시조이자 문명의 시조인 셈이다. 벽랑국은 전남 완도군에 위치한 나라였다 하는데 신라 후기 경덕왕 때 불렸던 탐진현 남쪽 섬의 하나가 벽랑도로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는 것으로 보아, 제주의 옛 왕국 탐라가 시작된 시기를 얼추 가늠하겠다.

하지만 제주도에는 국가와 문명의 시조 이전에 천지창조의 신 설문대 할망이 있었다. 치마폭에 흙을 날라 세상을 만들다 터진 치마틈 사이로 새어나온 흙이 제주도 360개 오름이 되었다는 그 신화의 주인공. 500명의 아들을 먹여 살리려 죽을 쑤다 솥에 빠진 것을 모르고 그 어미의 살을 먹은 아들들이 슬픔과 부끄러움을 못 이겨 산속에 들어가 500장군바위가 되었다는 바로 그 전설의 어머니. 500바위의 장군들은 불교 속으로 들어와 제주도 오백나한이 되었다.

반도의 뭍에서는 잊혀져 사라진 천지창조의 신화가 제주도에는 설문대 할망의 기억으로 살아있다. 그리고 할망의 아들들은 불교의 아라한들로 변신하였다. 그러니 다시 생각한다. 마라도의 애기업개와 장군과 동자가, 황우지의 선녀가, 또 용바위와 용연으로 제주도 곳곳에 자리한 수많은 용님들이 모두 설문대 할망의 자손인가 보다고. 그리하여 언젠가는 마라도의 해수관음과 제주도의 순교자들까지도 모두 할망의 또 다른 자녀들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제주도가 영원한 신들의 고향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민순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주요 논문으로 〈조선 초 법화신앙과 천도의례〉, 〈조선 초 조계종의 불교주도적 자의식과 종파 패러다임의 변화〉, 〈정도전과 권근의 불교이해와 그 의의〉, 〈조선 세종 대 僧役給牒의 시작과 그 의미〉, 〈조선전기 승인호패제도의 성격과 의미〉, 〈조선 초 불교 사장(社長)의 성격에 관한 일고〉, 〈조선전기 도첩제도의 내용과 성격〉, 〈전환기 민간 불교경험의 양태와 유산〉, 〈참법(懺法)의 종교학적 기능과 의미〉, 〈조선전기 수륙재의 내용과 성격〉, 〈한국 불교의례에서 ‘먹임’과 ‘먹음’의 의미〉, 〈전통시대 한국불교의 도첩제도와 비구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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