歲月 雜想
newsletter No.640 2020/8/18
염병 코로나 19가 잡히질 않습니다. 장마도 심하고 지루했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좋았습니다. 방구석에 앉아 즐기는 음악 듣고 읽고 싶은 책 읽곤 하면서 종일 빈둥거려도 됐으니까요. 그런 제 몰골이 우아한 것이 아님을 모르진 않습니다. 이미 낡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인이 ‘늙은이’를 이렇게 읊었더군요. (기형도의 시 <늙은 사람>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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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앉아있다.
최소한의 움직임만을 허용하는 자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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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혐오한다, 그의 짧은 바지와
침이 흘러내리는 입과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허옇게 센 그의 정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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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는 쉴새 없이 단장을 만지작거리며
여전히 입을 벌린 채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의 육체 속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 무엇이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그런데 아무리 ‘침 흘리며 눈치도 없이 허옇게 센 정신’으로 산다 해도 이 난세에 ‘그래서 좋다’니요. 게다가 자기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아도 되니 ‘좋다’니요. 이것은 ‘너는 코로나에 걸렸지만 나는 걸리지 않았고, 너는 산사태로 집이 무너졌지만 내 집은 말짱하다’면서 은밀한 ‘승자의 미소’를 머금은 발언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건 망발(妄發)입니다. 방역과 치료의 현장을 조금이라도 마음 쓴다면, 수재민의 참상을 의도적으로 눈감아버리지 않는다면, 감히 발언할 수 없는 말입니다. 몰매 맞고 내쳐지기 꼭 알맞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화를 누그러뜨리고 제 말을 들어주십사고 감히 여쭙니다. ‘좋음’을 일컫는 제 속내는 남과 견주어 내 다행스러움을 누리려는 게 아니라 그 소용돌이에서도 제법 견디고 있는 저 자신이 대견해서 스스로 저를 토닥이기 위한 거라고요.
그러나 그게 사실이어도 말은 조심했어야 합니다. 승자의 미소를 머금은 ‘좋다’가 아니라 연민의 표정으로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그윽이 안으면서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의 작은 소리로 ‘좋다’고 하는 조심성은 가졌어야죠. 그런데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무런 꾸밈없이 뚜렷하게 ‘그래서 좋았다’고 했습니다. 의도적이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아직 제가 ‘여전히 입을 벌린 채/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듯’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의 육체 속에서/유일하게 남아 있는...거추장스러운’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인 거죠.
‘재난의 늪’에서 허덕였던 적이 있습니다. 전쟁이 그랬고, 절망만 감돌던 병실이 그랬습니다. 그때 저를 바라보던 따듯한 눈길들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 눈길은 측은함, 연민, 동정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게 힘이 되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따듯한 눈길에 잠겨있던 또 다른 눈길도 저는 잊지 못합니다. 드러나게 또는 가린 채, 그들은 자기가 망자나 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제 경우를 통해 확인하면서 이를 감격하고 또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 다른 눈길을 읽으면서 이윽고 저는 제가 그들이 자기들의 행복을 확인하는 도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복을 늘 확인해야만 마음이 편했고, 이를 실증하는 불행한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했었는데 그것이 바로 저였던 거죠.
저는 자존심이 상했고 분노를 삭여야 했습니다. 그들의 따듯한 미소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정황에서 그들로부터 비롯한다고 여긴 어쩌면 굴욕을 꿀꺽거리며 삼켜야 했습니다. 마침내 저는, 참 못됐지만, 그들의 따듯한 미소를 제게 가하는 잔인한 폭력이라고 여기게 되었고, 나아가 무릇 ‘감사’란 ‘타자에 대한 은폐된 저주’라고 생각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러한 저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전장에서도 병실에서도 망자는 말이 없습니다. 산자만이 살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제 분노나 굴욕도 실은 산자의 발언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처한 현실의 사태란 결국 산자가 직조(織造)하는 이른바 박탈감이나 우월감의 뒤엉킴이고, 그래서 그것은 정황적이고 가변적인 것일 뿐입니다. ‘산자의 감사가 타자에 대한 은폐된 저주’라는 주장도 실은 자기의 상대적 박탈감을 망자를 빙자하여 정당화하려는 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분노도 다르지 않고요. 그러니 제 발언에 주목할 까닭이 없습니다. 눈에 띄었다 해도 ‘살아있되 모자라거나 덜된 자’의 추태 이상으로 여겨지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 이랬을 겁니다. ‘자기가 재난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축복으로 알고 감사하지도 못하는 저 인간이 거기서 허덕이는 어려운 사람에게 따듯한 눈길이나마 줄 수 있을까?’
이런 ‘인식’ 때문인지요. 유대인들은 ‘남은 자(remnant)’를 ‘살아남은 축복받은 소수’로 기리면서도 끝내 이를 ‘의로운 남은 자’로 제한했습니다. ‘망자도 다 같은 망자가 아니며 산자도 다 같은 산자가 아니다’는데 이른 거죠. 저주받은 망자도 있고 제물로 바쳐진 망자도 있으며, 징벌이 유예된 산자도 있고 새로운 일을 감당할 주체로 선택받은 산자도 있는 거고요. 그러니 신비한 섭리를 탓할 오만한 발언은 삼갈 수밖에 없습니다. ‘재난과 축복, 감사와 저주’가 종교문화 안에서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지 새삼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장병길 선생님의 논집 <한국종교와 종교학>을 읽다가 눈에 띈 대목이 있습니다. “무당고”라는 논문(pp. 379-402)의 한 절인 ‘신봉자’에서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탈(頉)이나 살(煞)은 비일상권에서 일상권에 침입한 타자이다. 그 타자의 침입이 없으면 일상은 평온하다. 무당이 필요한 것은 그가 이 비일상적인 타자를 막고 쫓아내어 복을 불러들이기(逐黜災禍 招致幸福)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위한 굿의 효험은 신봉자들에 의하여 지지된다.’
이에 의하면 무당이나 굿이 절대적이진 않습니다. 신봉자가 그 존재의미를 결정합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자기의 삶을 오롯하게 스스로 건사하는 존재라는 것은 아닙니다. 무릇 삶은 일상과 비일상, 곧 인간을 훨씬 넘어서는 자연과 초자연을 아우르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좋든 싫든 ‘비일상적인 것’은 일상 속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동티가 나게 마련인 거죠. 재난은 불가피합니다. 아예 삶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봉자들은 평범한 일상에서 안도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사는 것이 꿈인데 그게 늘 깨집니다. 그래서 온갖 계(界)를 넘나들며 다듬는 어떤 존재가 필요합니다. 무당이 그런 존재입니다. 무당은 신봉자의 소산(所産)입니다.
그런데 장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무당을 낳은 이 소박한 여느 사람들의 꿈이 유교, 불교, 도교 등과 만나면서 ‘탈이나 살이 희인희과(喜因喜果)나 악인악과(惡因惡果)의 탓으로 바뀌고 선령(先靈)에 대한 푸대접으로 인한 결과’로 바뀌면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신의 뜻’을 준거로 설왕설래하는 그리스도교의 전승을 여기에 첨가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소박한 꿈의 무산’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까닭을 찾아 나선 진지함이 종래 삶의 해체에 이르고, 빈틈없는 규범의 설정과 실천의 모색이 마침내 삶을 무기적(無機的)이게 한 것을 일컫습니다. 세상이 한껏 까다로워져서 다행함의 정서를 그런대로 다행하게 놓아두지 않게 되었다는 거죠.
저는 이 서술에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내게 내재해 있으리라 여겨지는 이 소박한 기억의 전승에 저의 지금을 잇고 싶었습니다. 내 다행함을 다행한 것으로 누리게 하면 그것이 타자의 불행에 대한 또 다른 적극적인 접근일 수도 있지 않을는지 해서요.
에두름이 돌아올 길을 잃고 만 것 같습니다만 제가 이 난세를 살면서 아직 내가 병들지 않고 집이 무너지지 않아 내 할 일 하며 사는 것이 무척 ‘좋다’고 한 까닭을 이제 겨우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불안합니다. 다시 앞의 시인이 쓴 다른 시가 떠오릅니다. (기형도의 시 <노인들> 부분)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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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하다
‘목을 분지르며’ 스스로 저야 하는데 아직 살아있어 이런 허황한 생각을 중언부언하는 ‘추태’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어려운 세월 잘 지내시길.
정진홍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고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학술원 회원
저서로《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 종교담론의 지성적 공간을 위하여》,《열림과 닫힘: 인문학적 상상을 통한종교문화 읽기》,《경험과 기억-종교문화의 틈 읽기》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