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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45호-고통에 대한 생각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0. 9. 29. 14:39

고통에 대한 생각

 

newsletter No.645 2020/9/29



고통의 문제는 우리의 경험을 공식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상징 자원의 부족에서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사건을 마주할 때 위태로운 인간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밀려오는 우리의 노력이 항상 실패로 끝나게 되어 있다는 확신에 대한 부담감에서 비롯된다.

-Iain Wilkinson and Arthur Kleinman, A Passion for Society에서-


1.

토르콰토 타소(Torquato Tasso)의 《해방된 예루살렘 Jerusalem Liberated》에는 탕글레드와 클로린다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가 소개된다. 십자군에 가담한 탕글레드는 전장에서 마주친 한 전사에게 죽음을 안겨주는데, 불행히도 그는 탕글레드가 사랑하는 연인 클로린다였다. 탕글레드는 사라센 기사의 옷을 입은 클로린다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칼을 휘둘러 죽인 것이다. 탕글레드는 이러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십자군을 공포에 떨게 했던 마법의 숲으로 돌진해서 보이는 대로 칼을 휘둘러 나무들을 베어낸다. 그런데 그가 자른 나무들 사이에서 피가 흐르고 클로린다의 고통에 찬 원망의 소리가 들려온다. 자신의 영혼은 나무에 깃들어 있는데, 이렇게 또다시 자신에게 칼을 휘둘러 상처를 주니 너무나 고통스럽다는 하소연이다.

탕글레드와 클로린다의 비극적인 이야기에서 캐시 카루스(Cathy Caruth)는 상처와 목소리가 나란히 공존하며 서술되는 부분에 주목한다. 과거에 겪은 상처는 생존자의 삶에 한 지층을 이루면서 반복해서 그를 과거의 고통으로 소환하는데, 카루스는 생존자의 트라우마는 상처에서 생성되는 목소리의 발화와 경청을 통해서 치유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고 말한다. 과거의 시간에 봉인된 상처는 시간의 물결에도 소멸되지 않고 반복해서 생존자를 고통의 세계로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봉인된 과거를 열어젖히는 행위가 필요하고, 그러한 행위의 출발점은 고통스러운 경험에 대한 말하기와 듣기이다. 카루스에 의하면, 그러한 하소연 혹은 한탄하는 고백의 언어는 생존자 본인에게는 충분히 인지되지 않은 진실의 조각들을 현재의 시간으로 실어 나른다. 그리고 생존자의 기억 속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진실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잡아가면서 상처에 맞설 힘을 안겨준다.

2.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상실과 고통의 비극적인 사건이 존재와 행위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자각을 가져온다는 이야기를 발견한다. 앤 레키(Ann Leckie)의 공상과학소설 ‘라드츠 3부작’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 정확하게는 함선 저스티스 토렌호 인공지능의 일부가 이식된 인간 생체로서 상관의 명령을 수행하는 여러 보조체 가운데 하나인 제1에스크 19호 - 의 이야기가 그렇다. 이 인공지능 개체는 남자와 여자, 인간과 기계, 복종과 저항, 감정과 이성 등의 경계선 위에서 ‘자기만의 고유한 주체’로서 자신의 자리를 재구성해간다. 이 인공지능 개체가 명령을 수행하는 기계적인 존재로부터 보편적인 가치와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성찰적인 존재인 ‘브렉’으로 자기 존재를 재설정하게 한 결정적인 원인은 라드츠 군주의 명령을 따라 자신이 애정을 느꼈던 지휘관을 사살했다는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폭군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여정에서 브렉은 ‘문명화’와 ‘정의, 공정, 이익’의 정치이념을 앞세운 라드츠 제국의 뒤편에는 불평등 구조와 억압과 착취의 관행이 있음을 조금씩 자각해 간다. ‘조금씩’, ‘서서히’라는 단어가 말해주듯이 브렉의 존재론적 위상과 자각은 ‘과정’ 중에서 형성되며 완결되지 않는다. 라드츠 군주에 의해 함선이 파괴되면서 함선의 인공지능에 속한 모든 보조체들이 소멸되고, 살아남은 단 하나의 보조체는 자신이 겪은 고통스러운 기억과 대면하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 ‘브렉’이라는 고유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 인공지능 보조체가 새로운 존재로 도약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자신의 행위에 찬사를 보내는 시민 바스나이드에게 자신의 존재와 과거의 행위를 밝히는 순간이다. 브렉은 자신이 섬기던 장교의 동생인 바스나이드에게, 자신은 인간이 아니며 군주의 명령으로 그의 언니를 총으로 죽였다고 고백한다. 소설에서 화자는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나는 그 말을 하는 동안 내비쳤을지도 모르는 아주 작은 감정의 흔적조차 바스나이드가 볼 수 없도록 얼굴을 돌렸다.”

3.

가을이 문턱에 이르렀는데, 코로나바이러스의 위세는 여전히 꺾일 줄을 모른다. 많은 사람이 죽고 아파한다. 일자리를 잃거나 장사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한편에서 한숨을 내쉬고, 다른 한편에서는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지쳐가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도 웃음과 활기를 잃지 않는 어떤 사람들은 안전한 곳에서 자신의 삶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기도 한다.

소설 속 라드츠 제국의 정치적 모토는 정의와 공정과 이익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행동은 불공정할 수 없고, 공정한 행동은 부정의 할 수 없다. 정의와 공정은 떼려야 뗄 수 없이 얽힌 채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화려한 수식어 뒤에는 엄격한 신분제와 불평등 구조, 그리고 억압과 착취의 폭력이 숨겨져 있다. 예컨대, 공정한 경쟁을 통한 신분 상승의 가능성은 누구에게 열려 있다지만, 실제로 지위의 상층부는 특정 계층에 한정되어 있다. 인맥과 집안 배경이 중요한 신분 상승의 통로이자 디딤돌로 작용하는 사회가 라드츠 제국인 것이다. 심지어 그곳은 병합 전쟁 중에 포획한 인간들에게 인공지능을 이식해서 전쟁 무기로 재생산하는 끔찍한 만행이 자행되는 세계이다.

소설의 이야기가 실감나는 것은, 오늘날 세계에 드리운 정치적 수사의 장막을 코로나바이러스가 걷어 올리면서 우리가 보게 된, 아니 겪게 된 세계의 비참 때문이다. 그 비참함과 고통 앞에서 어떤 대상의 정체성이나 사건의 본질을 묻기보다 그 비참과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고통에 처한 존재들을 돕고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는 지름길일 것이다.

소설 속 브렉은 고통을 겪는 존재들을 위해 애쓰지만, 그러한 애씀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는 불안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불완전함과 나약함을 승인하고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부끄러워하면서 그 오류를 수정해가는 ‘사물-존재’이다. 세계의 비참을 개선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는 불안감은 현실의 행동을 제약하는 부정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소설 속에서 라드츠 제국의 군주를 제거하려는 브렉의 계획은 실패를 예상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라드츠 군주는 복제를 통해 수천 명의 존재로 존재하면서 3천년 동안 제국을 다스려온 존재이기에, 그중 한 명을 죽인다고 해서 세상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렉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브렉의 눈에 비친 오늘날 인간 종은 어떤 존재일까?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고 여러 지역에서 기후변화에 따른 대규모의 생태적 재난이 벌어지고 있다. 언제나 희생자 명단의 앞줄은 생태적·사회적 서열에서 제일 낮은 존재들이 차지한다. 그들이 외치는 하소연에 귀를 기울이고, 그 탄식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며 그들에게 손을 내미는 자는 누구일까? 세계의 비참을 낳는 현실 구조에 어떻게 균열을 일으킬 수 있을까? 그 물음에 늦은 밤을 서성이며 보낸다.

 

 

 







 


박상언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배아줄기세포연구의 생명윤리담론 분석: 한국 기독교와 불교를 중심으로>,<간디와 프랑켄슈타인,그리고 채식주의의 노스탤지어:19세기 영국 채식주의의 성격과 의미에 관한 고찰>,<신자유주의와 종교의 불안한 동거: IMF이후 개신교 자본주의화 현상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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