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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시국의 한국개신교로 인해 재조명된 종교와 미디어문화연구담론


newsletter No.646 2020/10/6

 

 




 


한국 보수개신교계, 아니, 엄밀히 말해 교계를 ‘대표’하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는 인물 및 단체들의 최근 발언들을 접하고선 정말 심각하게 그들에게 질문하고픈 것들이 생겼다. 우선 해당 발언들을 좀 정리해보자면, 그들이 말하는 ‘목숨’과도 같은 ‘종교의 자유’는 맥락상 ‘예배를 집행할 자유’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 같고, 그 ‘예배’ 역시 좁은 의미에서의 예배, 즉 함께 모여서 일정 시간 동안 진행하는 ‘제의’(ritual)로서의 예배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좁은 의미에서의 제의적 행사를 온라인으로 하건 비대면으로 하건 그것은 각 교회들이 자발적으로 결정할 문제이지, 정부가 허락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이 핵심인 것 같다. 아울러 그러한 주장을 펼치는 과정에서 교회를 ‘영업장이나 사업장’ 취급하지 말아 달라는 발언도 나왔다.

우선 보수개신교계 안에서조차도 비대면 예배의 타당성을 지지하는 발언들은 이미 적지 않게 나오고 있으니, 여기에서 ‘대면 예배만을 예배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대한 변증을 따로 하진 않겠다. 다만, 그저 비대면 예배도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다’ 정도의 시각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예배를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매개된 종교행위’가 실용적 측면과는 별도로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경이로운(marvelous, awe-inspiring) 것으로서, 종교적 맥락 안에서 이루어지는 매개된 소통(mediated communication)은 그 자체가 어떤 면에서 일종의 신(神)적인 것이기까지 하다는 첨언을 하고 싶다. 즉, 매개된 소통 그 자체가 다른 종교들은 물론이거니와 기독교적 관점에서 봤을 때,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신적인 속성(divine attribute)을 지니며, 또 그렇기 때문에 매개된 소통의 장은 각종 악용으로 인해 병든 부분들로부터 더욱 회복되어야 하고 또 해방되어야 하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필자의 학위논문 일부에서도 다루었으며, 올해에 무료로 배포된 Digital Ecclesiology(디지털 교회론)라는 전자책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해외 학자의 글들도 해당 주제와 관련된 많은 통찰을 제공하고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더 이상 나열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의 개신교를 대표한다고 하는 분들에게 너무나 기초적이고도 근본적인 질문을 안 할 수가 없는데, 도대체 언제부터 종교개혁을 통해 탄생한 개신교가 ‘제의중심’의 종교가 되었는가? 개신교인에게 있어서 ‘목숨과도 같은’ 것이라면 ‘개신교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게 언제부터 ‘제의’였단 말인가? 물론, 지금의 현실은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보수개신교회들도 이른바 ‘주일성수’를 중심으로 한 정기적 제의가 개신교신앙의 핵심으로 여겨져 버리게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신학교는 고사하고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종교개혁에 대한 겉핥기 식의 정보만 접했어도 그러한 제의중심적 신앙은 개신교와는 결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왜 한국의 보수개신교계를 대표한다고 하는 분들이 오히려 그러한 개신교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를 고착화하는 발언들을 하는 걸까?

‘신학교는 고사하고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종교개혁에 대한 겉핥기 식의 정보만 접했어도’ 납득이 잘 안 되는 발언이 또 있는데, 바로 교회를 ‘영업장이나 사업장’ 취급하지 말아 달라는 부분이다. 역시 종교개혁에서 가장 파격적이었던 선언들 중 하나가 그러한 ‘성속구분’에 대한 반론이 아니었던가? 개신교신앙의 핵심원리들을 일관성 있게 적용할 경우, 모순적이게도 제도교회 및 리더들의 종교적 권위와 권력이 근본적으로 도전을 받게 되기 때문에, 오히려 그러한 권력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종교개혁 이전의 관점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개신교와는 도무지 맞지 않는 이러한 신앙관, 예배론, 교회론 등이 왜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것일까? 더군다나 현재의 전염병시국에 왜 그러한 관점들을 재고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하게 밀어붙이려고 하는 걸까? 물론 이러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회문화현상에 대한 실증적 질문이라는 측면에서) 사회과학적인 의문점들을 한방에 해결해줄 수 있는 설명을 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적어도 큰 부분을 설명해줄 수 있는 학문적 접근들은 이미 있다고 생각한다.

미디어와 (종교를 포함한) 문화의 영역에서 권력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들여다보는 학자들이 있는데, 이들이 취하는 접근들을 크게 둘로 구분해서 각각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와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정치경제적 관점에 가까울수록 ‘문화’의 영역도 결국 권력으로 구성된 경제적 구조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보고 있고, 문화연구에 더 집중하는 학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구조들을 유지하려는 권력에 대항해 다양하고도 창의적인 형태로 저항하고 스스로를 해방하는 시민들의 활동에 더 초점을 두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구조(structure)와 주체성(agency)중 어느 부분에 더 방점을 두느냐의 차이다. 물론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둘 중 어느 한쪽의 접근만 타당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른바 ‘케바케’(case by case)일 수밖에 없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문화현상을 어떤 맥락에서 다루고 있느냐에 따라 정치경제와 문화연구의 접근이 각각 갖고 있는 설명력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치경제와 문화연구간의 상호관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Robert Babe의 Cultural Studies and Political Economy: Toward a New Integration이나 Tanner Mirrlees의 Global Entertainment Media: Between Cultural Imperialism and Cultural Globalization이라는 책에서 잘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적어도 목사중심, 제의중심, 성속구분과 같은 한국개신교내의 현상들은 정치경제적 관점으로 많은 부분이 설명되는 것 같다. 이 말을, ‘대한민국의 목사들 개개인이 돈에 눈이 멀어서 교회운영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는 뜻으로 오해를 하면 안 된다. 오히려 많은 경우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말들을 스스로도 굳게 믿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는 개념들이 개신교 본래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함에도 불구하고 왜 확대-재생산이 되고 수많은 개신교인들이 받아들여 믿고 실천하고 있는가라는 거시적인 질문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일반화를 할 수 있는 대답을 제공하는 관점이 정치경제적이라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통계발표 시기 및 단체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대략 6만에서 많게는 8만여 개의 개신교회가 있다고 한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대략 4만여 개의 편의점이 있다고 한다. 즉 개신교회의 숫자가 많게는 편의점의 두 배가 된다. 그런데 편의점은 아무나 거부감 없이 드나드는 장소이다. ‘개종’과 같은 인식변화의 필요 없이 모든 사람이 대상고객이라는 것이다. 반면 대한민국 개신교인의 수는 천만이 조금 안 돼서, 이제 전체국민의 20%에 못 미친다. 시장의 용어를 빌려 개신교인의 수를 수요(demand)로 보고, 개신교회 및 목사의 수를 공급(supply)로 상정해봤을 때, 수요에 비해 공급이 이만큼이나 과하게 유지되고 있는 ‘업종’이 또 있을까? 신자유주의 경제체제하의 시장의 모습을 그 어느 업종보다도 충실하게 구현해내고 있으며, 그에 맞게 개신교회간의 신도수, 보유자산, 건물크기 등의 차이도 너무나 크게 난다. 전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다고 하는 한국의 대형교회와 서울에서 거의 길 건너 하나 둘씩 보이는 상가교회간의 격차는 웬만한 대기업과 영세기업간의 격차 못지않다.

이러한 구조적 상황에서 개신교의 사상과는 정 반대일지라도 제도교회의 구심력을 강력하게 지지해주는 관념들, 즉, 제의중심적 신앙관이라던가, ‘만인사제론’와는 반대됨에도 불구하고 목사에게 부여되는 일종의 영적/신적 권위, 또는 ‘물리적 장소에 모여서 함께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다’와 같은 생각들이 과연 쉽게 재고가 될 수 있을까? 적어도 ‘종교’를 포함하는 ‘문화’에 대해 정치경제적으로 접근하는 학문적 입장에서는 쉽지 않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물론, 이것이 단순화된 경제적 결정론(determinism)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정론에도 determinism in the last instance, 즉 ‘결국에는 모든 것이 정치경제적으로 결정된다’는 관점이 있고, determinism in the first instance, 다시 말해 ‘주체성과 저항도 일단은 정치경제에 의해 결정된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관점이 있는데, 요즘에도 전자를 주장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어떻게 보면 현 시국에서도 대다수의 교회가 대면예배를 자제했다는 사실이 단순화된 결정론을 반박해주는 사례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방역수칙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관습을 강행했던 교회가 ‘일부’라고는 하더라도 그 ‘일부’의 숫자가 너무 많다. 특히 나라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그리고 대면예배 강행까지는 아니더라도 제의중심, 목사중심, 성속구분 및 제도중심적 담론들이 재생산되고 있는 개신교회 현장은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극히 ‘일부’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교회는 어떻게 될까? 역시 정확한 예측은 불가능하며, 억지로 예상을 해보더라도 전문가들은 한 가지가 아닌 몇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를 내놓을 것이다. 여기에서 미디어문화연구의 주요 논쟁점을 또 하나 언급해야 하는데 바로 ‘기술결정론’ (techno-determinism)에 관한 시각 차이다. 정보매체기술의 변화가 사회에도 피할 수 없는 변화를 가져다 주는 막대한 영향력이 있다는 관점과, 역시 인간의 주체성이 기술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분별하여 수용하기 때문에 기술의 변화가 ‘결정적이다’(deterministic)고는 할 수 없다는 관점간의 긴장이 존재하는데, 이 역시 위에서 언급한 정치경제와 문화연구간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맥락과 상관없이 어느 한쪽의 관점만이 항상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최근에는 학계 안에서 기술결정론을 기각하려는 유행이 없지 않은데, 필자는 코로나19로 인한 온라인 종교활동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졌다는 현실 자체가 기술결정론이 통째로 기각될 수 있는 관점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매체’ ‘기술’등의 개념에 대한 광범위한 정의와 함께 ‘기술결정론’이 여전히 유효한 관점이라는 주장은 John Durham Peters의 The Marvelous Clouds(《자연과 미디어》, 이희은 역)이라는 책에서 자세하게 풀어주고 있다).

어찌되었건,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종교, 특히 개신교의 변화가 이루어질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뉜다. 혹자는 안 그래도 이미 극심한 ‘가진 교회’와 ‘못 가진 교회’간의 격차가 더 벌어져서 새로운 환경에 대처할 수 있는 자본과 기술 등을 갖춘 교회들만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예측을 하는 반면, 또 어떤 비평가들은 원래부터 개신교가 추구해야 했던 정치적, 그리고 신학적 민주화가 마침내 새로운 환경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불완전하게라도 추진이 될 것이라는 조금 더 긍정적인 관측을 내놓는다. 한편, 웬만한 업종보다 훨씬 더 과잉공급상태에 있는 ‘개신교회 시장’이 새로운 환경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뼈를 깎는 고통의 과정을 거쳐 어느 정도는 ‘정리’가 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분명한 것은, 교회를 운영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제는 본래 의미에서의 ‘교회’ 전체가 지금까지 제기한 논의의 지점들, 즉, 개신교에서 제의와 목사의 위치 및 역할, 종교적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매개된 소통행위가 던져주는 시사점들, 성속구분, 사회문화현상으로서의 종교에 대한 정치경제와 문화연구의 비판적 시각차, 그리고 종교와 기술결정론 등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씨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홍승민_
고려대학교 강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종교와 미디어, 그리고 문화간의 접점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으며, 연구물도 학제적으로 International Journal of Communication이나 Journal of Popular Film and Television과 같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술지와 Religions, 또는 Journal of Korean Religions와 같은 종교학 학술지, 그리고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 Research같은 신학/선교학 학술지에 두루 게재해오고 있다. 고려대학교 국제대학원과 국제학부에서 한국의 문화 및 한국의 종교에 관한 과목들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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