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기억(記憶)을 좇아 사족(蛇足)을 달고 싶습니다
newsletter No.664 2021/2/9
바야흐로 새해를 맞는다고 마음이 환하게 번거로웠는데 어느새 한 달하고도 열흘이 지나 새해가 헌 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아쉽습니다.
요즘은 늙은이들도 카톡으로 새해 인사를 합니다. 아니, 늙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받은 인사 중에 이런 메일이 있었습니다. “새해는 new opportunity로 꽉 차 있지.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런 것은 아냐. 늙은이들에게는 new memory로 채워야 겨우 지탱하는 새로운 찰나가 새해인 거야.” 또 다른 메일에는 이런 것도 있었습니다. “...흘러간 시간이 참 짧아서 / 시간으로 셀 수가 없네 // 사족을 달 겨를도 없네”
그 친구들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에는 제가 너무 모자랍니다. 하지만 그래도 앞에 친구의 말은 “지난 세월 헤아려 남은 삶을 다듬어야 끝이 흉하지 않다”는 ‘협박 어린 격려’로, 뒤에 친구의 말은 “쓸데없는 너저분한 일조차 할 틈도 없으니 하고 싶은 짓 마음대로 하며 살아도 잘못될 것 하나도 없어!’라는 ‘유쾌한 유혹’으로 받아드렸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어 제가 한 짓이 있습니다. 한국인이 저술한 대체로 <종교학개론>이라고 이름 할 책들을 모두 섭렵했습니다. 아주 꼼꼼하게요. 지난해가 거의 저물 때부터였습니다. 종교학을 공부한다면서 이제껏 살아온 저를 되살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제가 이미 읽은 책입니다만 다시 읽음은 사뭇 새로웠습니다. 문자 그대로 경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내심 우러르게 됨을 어쩌지 못하도록 그 책들은 모두 엄청난 저작이었습니다. 새삼 터득한 내용도 많고, 제 게으름이 부끄럽기 그지없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와 다른 물음의 결을 확인하고는 의아한 책도 있었고, 동료의식을 갖기 불편한 책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결같이 고마웠습니다. 충분히 저는 저를 볼 수 있는 거울을 확보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중에서도, 좀 부풀리면, 감동이 전율처럼 저를 휘몰아친 책이 있습니다. 제가 종교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되살피게 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장병길 선생님의 「宗敎學槪論」(서울. 박영사. 1975) 서문 첫 부분입니다.
宗敎學은 十數世紀 동안 單一 宗敎圈에서 살아오던 歐羅巴人들이 新世界를 發見함에 따라 異敎世界를 觀察하게 됨으로써 誕生하게 된 學問이었다. 神學이 護敎的‧規範的인 데에 反해서 宗敎學은 經驗的‧記述的 學問이며, 일찍이 막스 뮐러가 말하였듯이 「이 宗敎를 믿을 것이냐? 혹은 참다운 宗敎란 무엇이냐?」 따위를 取扱하는 것이 아니라 宗敎에 관한 知識을 얻는 데에 主眼點을 둔다. 즉 宗敎를 믿고 있는 人間의 現象을 그 硏究對象으로 삼는 學問인 것이다.
宗敎學이 韓國에서 關心의 한 對象이 된 것은 1945년 京城大學이 發足하고, 그 法文學部에 宗敎學科를 設置한 때부터이었으나, 宗敎學의 本格的 講座開設은 1960年代에 들어와서였다. 즉 이때부터 宗敎學科는 神學‧敎學‧經學 등으로 짜였던 從前의 敎科課程에서 脫皮하여 宗敎學 固有의 領域에로 能動的 接近을 試圖하였던 것이다. 그와 同時에 神學者들이 흔히 쓴 「宗敎學的‧神學的 硏究」란 曖昧한 姿勢로부터 上記의 宗敎學科는 脫皮하게 되었고, 宗敎學을 專攻하는 學生들의 數도 漸次로 增大되었다.
宗敎學은 廣義이건 狹義이건 간에 神學的 硏究일 수 없었다. 宗敎一般이 共有하고 있는 宗敎的인 思想‧體驗‧行爲‧組織‧文化 등의 諸現象을 究明함, 이것이 곧 宗敎學인 것이다.(p.3)
우리는 지금도 다른 사람에게서 ‘종교학은 무얼 하는 학문이냐?’는 물음을 받곤 합니다.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몰라도 저는 늘 해답이 궁합니다. 그래도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나마 얼버무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 안에서 그 물음이 일 때는 속수무책입니다. 그런 물음이 제게는 간헐적으로 일곤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글을 오랜만에 다시 읽으면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종교학이 무언지 이렇게 선명하게 답할 수 있는 것을 나는 왜 잊고 있었나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宗敎學은 .....宗敎를 믿고 있는 人間의 現象을 그 硏究對象으로 삼는 學問인 것이다.’와 이를 부연한 ‘宗敎一般이 共有하고 있는 宗敎的인 思想‧體驗‧行爲‧組織‧文化 등의 諸現象을 究明함, 이것이 곧 宗敎學인 것이다.’에 진한 밑줄을 긋고 싶습니다. 당연히 한국종교문화연구소에서 편간한 「張秉吉 敎授 論集: 한국종교와 종교학(서울. 청년사. 2003)」에서 편자 윤승용 선생님이 그 ‘인간’이 선생님의 연구에서는 민중개념을 함축한 ‘생민(生民)’으로 구체화 되어 있다는 언급(p. 6)을 유념하면서요.
저는 특정 학문의 계보를 운운하는 것을 잘 견디질 못합니다. 개개 학자의 학문다움의 특성을 자못 간과할 뿐만 아니라 누구나 활보하는 인식의 지평에다 끼리끼리의 벽을 쌓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호불호 간에 이전 학자의 발언을 때때로 내 거울로 삼아 지금 나를 ‘판별’해보는 일은 계보를 짓는 일과 다릅니다. 학문함의 예의, 아니면 윤리라고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저는 그 당연한 의무를 얼마나 게을리 하고 살아왔는지를 철저히 느꼈습니다. ‘새로운 기억’을 소환하는 일은 늘 놓치지 않아야 할 일임이 틀림없습니다.
장병길 선생님께서는 서문 말미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하십니다. 학자가 자기의 저술을 내면서 이보다 더 맑은 긍지를 드러내기가 쉽지 않은데 이를 읽으면서 저는 제 가슴이 마냥 탁 트이는 환희를 느꼈습니다.
....宗敎學이 탄생한지 百餘年만에, 그리고 틸레가 「宗敎史 綱要」를 세계에 물은 지 꼭 一世紀만에, 筆者가 拙稿로서 韓國人에게 宗敎學을 묻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긴다.(p.4)
한국에서 종교학이 펼쳐진지 76년 만에, 그리고 장병길이 「宗敎學槪論」을 한국에 물은 지 꼭 46년 만에, 누가 새로 지은 저술로 한국인에게 종교학을 묻게 될지 진심으로 기다려집니다. 이미 모두가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한국인에게 종교학을 묻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 종교학을 묻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런 문제의식 자체가 고루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의식에 공감한다는 것은 그러한 발언을 하는 당사자의 열등의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진심으로 그렇기를 바랍니다. 그럴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발언을 감히 하고 싶습니다. 분명히 사족인 줄 알면서요.
한 달이 휙 지났는데도 새해의 여운은 아직 즐겁습니다.
정진홍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고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학술원 회원
저서로《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 종교담론의 지성적 공간을 위하여》,《열림과 닫힘: 인문학적 상상을 통한종교문화 읽기》,《경험과 기억-종교문화의 틈 읽기》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