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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61호-오류에 관하여: 말할 수 없는 것들의 만남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1. 1. 19. 17:55

오류에 관하여: 말할 수 없는 것들의 만남


 

newsletter No.661 2021/1/19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논리철학논고』)고 말했던 비트겐슈타인 같은 언어철학자가 프레이저 같은 인류학자를 비판하다니 다소 의외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소고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 관한 비평>(Remarks on Frazer’s Golden Bough)을 “우리는 오류에서 시작하여 그것을 진리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오류’는 의도된 오류, 개념적 오류, 범주적 오류, 인식론적 오류 등 매우 다양한 층위에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조나단 스미스는 <황금가지가 꺾였을 때>라는 글에서 이런 결론을 내린다: 프레이저는 『황금가지』에서 ①네미 숲의 왕 즉 디아나의 사제는 무엇 때문에 그의 선임자를 살해해야만 했을까? ②이에 앞서 후계자는 왜 성스러운 떡갈나무 가지(황금가지)를 따야만 했을까? 라는 두 가지 물음을 던지고 거기에 대해 장황한 답변을 제시했으나 그 답변은 오류였다. 일찍이 에반스 프리차드가 프레이저의 설명은 대부분 ‘상상적 재구성’일 뿐이라고 갈파했듯이, 스미스도 네미 사제직에 관련된 그의 추론들은 근거가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황금가지』의 주된 목적은 달성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황금가지』 대단원의 결말에서 프레이저는 대담하게도 이 점 즉 자신의 두 가지 물음에 대한 답변이 달성되지 못했다는 점을 알고 있었노라고 언급한다. 그러니까 네미 사제직의 비밀을 푸는 것이 그의 참된 목적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스미스는 『황금가지』란 애당초 물음도 없고 따라서 답변도 없이 끝난 작품이라고 단정짓는다. 처음부터 프레이저는 교묘한 방식으로 오류의 장치를 설정해 놓았고, 그렇기 때문에 『황금가지』는 더 흥미롭고 가치있다는 것이다. 이는 『황금가지』의 주제에 대한 프레이저의 설명에 논리적인 일관성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그런데 그것은 프레이저에 의해 ‘의도된 오류’였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신화와 의례 개념 또는 주술과 종교 개념의 오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의 주술적・종교적 개념에 대한 프레이저의 설명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 설명은 인간의 주술적, 종교적 개념들을 착각 또는 잘못된 것(mistakes)으로 보이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즉 “미개인의 특징은 의견이나 생각에 기초하여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고 여긴 비트겐슈타인은 프레이저의 주지주의적이고 진화론적인 ‘설명’을 철저히 거부했다. 그에 따르면 ‘설명’은 이론에서 유래하는 가설이며, 진위와 관련된 의견이나 판단으로서의 그 가설을 검증하는 것을 뜻한다. 단, 그가 부정한 것은 설명 자체라기보다는 환원주의로서의 설명 태도를 거부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설명을 억지로 갖다 붙이는 대신 형이상학적인 가치나 궁극적인 가치 따위와 무관하게 다만 아무것도 덧붙이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기술하는 것이 더 의미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설명’이 배제되는 한편, 신화와 의례, 주술과 종교가 일종의 ‘언어게임’으로 간주되면서 이제 인간은 언어 개념에 기초한 ‘제의적 동물’로 규정되기에 이른다. 모든 의례는 세계를 설명한다거나 어떤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닌 하나의 본능행위라는 것, 그러한 의례 개념과 우리 자신의 언어 속에 파묻혀있는 신화 개념의 융합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주술과 종교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해석 방법이었다. “프레이저를 읽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이 모든 과정과 의미의 변화는 여전히 우리들 눈앞에 그리고 우리 언어 속에도 존재한다고…우리의 언어 안에는 완전한 신화가 존재한다.”


셋째, ‘언어게임’의 관점에서 볼 때 프레이저는 범주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이해이다. 여기서 범주 오류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등치시키거나 비교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결과 프레이저는 타자(미개인)의 개념을 서양적 개념(주지주의, 진화론, 설명, 과학 등)으로 재단함으로써 ‘나’와 ‘타자’ 사이의 심연이 깊어졌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프레이저 비판은 우리 문명인과 저 야만인이 얼마나 닮은꼴인지 즉 인간의 동일성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끝으로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에서 모든 연역적 추론을 미신(Aberglaube)이라고 규정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그러나 프레이저도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최선의 가설일 뿐”이라고 말했듯이, 자신의 연역적 추론방법이 확실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점에서 “프레이저의 정신세계는 협소하기 짝이 없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비평 또한 협소함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싶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도 자기 자신의 인식론적 오류 가능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기만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다. 아직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였다면 우리들은 진리를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치명적인 오류는 때때로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을 수반한다. 그런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비트겐슈타인에게 자기 자신의 극복은 사유의 길을 통해 세계를 영원의 관점에서 포착하는 것에 있었다. “신비로운 것은 세상이 어떠하다는 게 아니라 세상이 있다는 것”(『논리철학논고』)이라는 그의 말은 “누가 어린 시절의 신비를 앗아간 것일까”(『독일인의 사랑』)라는 막스 뮐러의 슬픈 회상을 떠올리게 한다. ‘철학’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고민할 때, ‘인류학’은 타자에 대한 이해를 추구한다. 비트겐슈타인은 프레이저 비평을 통해 철학과 인류학의 만남을 꿈꾸었던 것 같다. 양자가 마주치는 길 위에서 우리는 타자 이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 타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종교인은 아니었지만 그런 상상 속에서 무한한 치유의 길이 열릴 것을 꿈꾼 ‘종교적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철학’ 대신 ‘종교’를, ‘인류학’ 대신 ‘종교학’을 넣는다 해도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그나저나 신축년 한 해에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오류를 되풀이할 것인가?














 


박규태_
한양대학교 교수
저역서로 《일본 재발견》,《일본 정신 분석: 라캉과 함께 문화코드로 읽는 이미지의 제국》,《일본문화사》,《신도,일본 태생의 종교시스템》,《일본정신의 풍경》,《일본 신사의 역사와 신앙》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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