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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63호-소의 해, 신축년 2021년을 맞이하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1. 2. 2. 18:50

소의 해, 신축년 2021년을 맞이하여


 

newsletter No.663 2021/2/2

 





어릴 때 미술 시간에 사용하였던 크레파스에는 ‘살색’이 있었다. 그땐 사람들의 살색이 모두 그 색인 줄 알았다. 깜상이란 별명에도 불구하고 나의 얼굴을 그릴 때엔 그 ‘살색’을 칠하였다. 황인종의 피부색을 가리키던 ‘살색’은 인종차별적이라 하여 연주황색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살구색이라 부른다. 누군가 붉은색 살구를 만들어 낸다면 어떻게 될까? 무슨 색이든 이를 바라보는 우리는 사회적 학습과 경험 속에서 이를 판단하고 명명한다.

2021년 신축년을 맞이하여 또 하나의 색깔을 생각해본다. ‘한우’라 말을 들으면 ‘황우(黃牛)’가 생각난다. 젖소와 황우만 알던 시기 얼룩소는 젖소였고 서양 소였던 반면 한우는 황우로만 여겼다. 그런데 정지용의 향수에 나오는 얼룩소가 칡소를 가리킨다는 것, 그리고 한우에는 황우, 칡소, 흑우(黑牛)가 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나아가 신축년 ‘흰 소’ 띠의 해를 맞이하여 백우(白牛)가 있을 뿐 아니라 이것 역시 한우의 일종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알았다. 이 땅에 이렇게 다양한 소가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1399(정종 1)년에 편찬된 『우의방(牛醫方)』에는 백우의 그림과 설명이 나온다. 이에 의하면 흰 소에 머리가 황색인 소를 ‘우왕(牛王)’이라고 하는데 이 소는 주인에게 부귀를 가져다주고 그 자손에게도 좋으며, 가축이 번성하고 소가 많을 것이라 하였다.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는 백 마리의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면 큰 복을 받을 것이라는 고승의 말을 들은 후, 백 마리의 소[百牛]를 대신하여 시장에서 흰 소[白牛]를 구해 제사를 지내 복을 받았다는 전설도 있다. 이런 예를 볼 때 조선시대 백우가 전혀 낯설진 않았던 것 같다.

목조의 백우 전설을 염두에 두면 조선의 종묘에 백우를 희생으로 사용할 법도 하다. 그런데 조선시대 종묘에서는 독특하게 흑우를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국가 제사에는 희생이 반드시 사용되었는데 소를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겨 대사(大祀)나 국왕의 친제(親祭) 때만 사용하였다. 그런데 문묘 석전과 조선후기 대보단에서는 황우를 사용하였고 종묘와 사직에는 흑우를 사용하였다. 흑우를 사용하게 된 명확한 근거는 없다. 『주례』에 의하면 양사(陽祀)인 종묘에는 붉은 소[騂]를 사용하고 음사인 사직에는 검푸른 소[黝]를 사용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중국과 관련된 것에 황우를 사용하고 조선의 사람과 영토신에게 흑우를 사용하였다.


나는 최근 조선시대 국가 제사에 희생으로 사용된 흑우를 연구할 기회가 있었다. 종묘 제향에 흑우를 사용했다는 사실도 흥미롭지만 그 수효가 계속 증가하였던 까닭 역시 궁금하였기 때문이었다. 지방에서 중앙 정부에 올리는 진상품의 수가 후기로 갈수록 대체로 줄지만 흑우는 효종대 20마리에서 숙종대 25마리, 영조대 35마리, 정조대 45마리, 고종대 47마리로 계속 증가하였다. 이렇게 흑우의 수가 증가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종묘 내 신실의 증가 때문이었지만 그 외에 전염병과 가뭄 역시 그 증가를 증가시켰다. 조선후기 빈번한 재난의 발생은 국왕으로 하여금 기우제의 현장에 나아가게 하였다. 종묘와 사직을 비롯하여 선농단, 남단, 북단 등에도 국왕이 기우를 위해 나아갔다. 이러한 국왕의 친행 기우제에서는 희생으로 흑우를 사용하였다. 결국 가뭄 등의 재난은 흑우의 소비를 증가시킨 것이다. 당시 재난을 소 역시 피하기 어려웠다. 우역(牛疫)이 성행하여 소의 집단적 폐사가 빈번하였다. 그런 가운데에도 흑우는 백성들을 위한 제사의 제물이 되었다.

우역의 성행이 일시적인 현상이라면 흑우에게 힘든 또 다른 것은 종묘까지 이르는 긴 여정이었다. 흑우는 제주도에서 진상하였다. 한때 거제도에서 5마리가 진상되기도 하였지만 지속되지 않았다. 제주도에서 3살배기 소 40여 마리가 두 척의 배에 나뉘어 험한 물길을 지나 육지의 강진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충청도 은진의 도회소(都會所)로 옮겨져 호서의 여러 고을에 나뉘어 길러진 다음 한양의 전생서(典牲署)로 다시 옮겨졌다. 여기서 다시 일정 기간 양육된 흑우는 제사일에 맞추어 향소(享所)로 나아가 도살되어 제상에 올려졌다. 제주도에서만 흑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험한 물길과 먼 여정, 그 사이에 도사린 역병의 위험 등을 피하기 위해 한양 가까운 곳에 목장을 만들고자 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조선 내내 흑우는 남쪽의 제일 끝자락 제주에서 한양까지 올라와 한 나라의 안녕을 위한 제물이 되었다.

백우의 해에 흑우의 이야기가 길었던 것 같다. 백우이든 황우이든 흑우이든, 그리고 칙소이든 이 땅의 소는 소처럼 우직하게 우리와 함께 있었다. 이런 소를 두고 『우의방』의 서문을 쓴 방사량(房士良, ?~?)은 “아! 한 마리의 소여, 어찌 이렇게 여러 곳에 사용되는가? 하늘에 제사 지내면 천신이 이르고, 종묘에 제사 지내면 귀신이 흠향한다. 백성의 조석간 목숨과 군대의 경비 자원이 모두 소의 힘에서 나온다. 하늘과 땅에 감응하고 백성과 나라에 공용됨이 크도다.”라고 하였다. 한우라 불리는 다양한 소들이 이 땅에서 베푼 공로가 그만큼 컸다. 이젠 맛으로밖에 못 느끼는 한우의 정체를 색깔만큼이나 다양했던 그들의 역할과 동행(同行)의 추억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천천히 우직한 마음으로 어느 때보다 힘든 2021년을 견디어 나가길 바란다. 꿈속에서라도 우왕(牛王)을 볼 수 있기를 기원한다.

 











 


이욱_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주요 저서로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조선왕실의 제향 공간 –정제와 속제의 변용>>, <<조선시대 국왕의 죽음과 상장례-애통・존숭・기억의 의례화>>, <조선후기 국가 제사와 제주도 흑우의 진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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