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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62호-도끼와 칼 그리고 아틀라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1. 1. 27. 14:37

도끼와 칼 그리고 아틀라스




newsletter No.662 2021/1/26

 

 


이탈리아 북부 도시 페라라(Ferrara)의 스키파노이아 궁(Palazzo Schifanoia)에는 소위 '월력의 방‘(Salone dei Mesi (Hall of the Months))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15세기 중반 페라라를 다스린 에스테 가문의 보르소 공작은 프란체스코 델 코사(Francesco del Cossa), 코지모 투라(Cosimo Tura) 등 페라라의 화가들에게 이 방의 벽에 1년 12달을 상징하는 이미지들을 그리게 했다. 삼단으로 구성된 이 벽화들 하단에는 한 해 동안 보르소 공작의 영지 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이 묘사되어 있고(지상) 상단에는 각 달을 지배하는 올림포스 신들과 그들의 상징물들이 묘사되어 있으며(천상), 이러한 하단과 상단 사이, 즉 지상과 천상의 중간에는 황도 12궁 점성술 상징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20세기 초 독일의 미술사학자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1866-1929)는 이 프레스코화의 3월의 이미지 가운데 황도 12궁 양자리에 그려진 한 남자에 주목했다. 흰옷을 입고 허리에 노끈을 매고 있는 이 어두운 얼굴의 남자는 어떻게 양자리의 상징으로 15세기 이탈리아에 나타나게 되었을까. 바르부르크는 1903년 출판된 문헌학자 프란츠 볼(Franz Ball, 1867-1924)의 저서 <천구Sphaera>를 비롯한 여러 문헌을 검토하고 나서 이 남자의 모습이 인도의 점성술서에 나타난 양자리 첫 번째 데칸(decan, 혹은 십분각은 이집트 점성술에서 유래한 것으로 황도대를 각 10도씩 36개로 분할한 것)의 이미지라는 것을 확인했으며, 또 이 이미지는 그리스 신화의 페르세우스 이미지와 연결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바르부르크가 스키파노이아 궁 월력도에 그려진 남자와 페르세우스의 연결점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6세기 인도의 점성술사이자 천문학자인 바라하미히라(Varahamihira)의 글에 양자리의 첫 번째 데칸이 '검은 얼굴, 붉은 눈, 흰옷, 허리띠' 뿐만 아니라 '손도끼'도 지니고 있다고 쓰인 부분에 주목했기 때문이었다. 로마시대에 제작된 대리석 점성술 판 <타불라 비앙키니(Tabula Bianchini)>에서도 양자리의 첫 번째 데칸은 '손도끼'와 유사한 '이중도끼'를 들고 있었다. 한편 아랍의 점성술서에는 양자리의 첫 번째 데칸이 ‘손도끼’는 아니지만 ‘칼’을 들고 있었고, 머리에는 터번을 두르고 다른 한 손에는 누군가의 머리를 들고 있는 이미지로 묘사된 것을 볼 수 있었다. 머리에 무엇인가를 쓰고 칼을 들고 누군가의 머리를 든 이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와 유사한 형태는, 기원전 3세기 그리스 시인 아라투스(Aratus)의 천체에 관한 시집 페노메나(Phaenomena)를 바탕에 두고 만들어진 9세기 채색 필사본 <라이덴 아라테아Leiden Aratea>에서 찾아볼 수 있었는데, 그 이미지는 다름 아닌 바로 그리스의 페르세우스였다.

‘신은 디테일에 깃든다’는 말을 자주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는 바르부르크답게 이 모든 논의는 책과 그림들을 세세히 들여다보고 또 서술과 이미지 속의 미세한 디테일 - 모자, 터번, 칼, 도끼 등을 주의 깊게 관찰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러한 세세한 디테일에 주목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가 따로 떨어진 듯한, 서로 연결되지 않을 듯한 책들과 이미지들을 나란히 놓고 사고했다는 점이다. 그의 이러한 사유 방식은 다양한 시공간 속의 수많은 이미지를 검은 패널 위에 나란히 배치했던 말년의 작업 <아틀라스 므네모시네 Bilderatlas Mnemosyne(1924-1929)>를 통해 구체화된다. 여기서는 도미니코 기를란데요의 프레스코화 <세례자 요한의 출생>에서 과일바구니를 들고 방으로 걸어 들어오는 여인과 세사 아우룬카 대성당의 에리트레아의 시빌라, 산드로 보티첼리의 <그리스도의 유혹>에서 삼나무 장작을 지고 걸어오는 여인, 바르부르크 당대의 한 이탈리아 농촌 여인의 사진 등이 나란히 놓이고, 동물의 장기를 들여다보는 장복술사의 이미지와 램브란트의 <해부학 교실>이, 데모크리토스와 헤라클리토스의 대화를 그린 그림과 성 바오로와 성 베드로의 대화를 그린 그림이 나란히 놓인다. ‘파토스포멜(Pathosformel, 정념정형)’이라는 것이 <아틀라스 므네모시네>를 관통하는 하나의 큰 주제라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토스포멜’은 이러한 이미지들, 개별적인 것들에 선행해서 존재하는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러한 개별적인 이미지들이 나란히 놓인 ‘옆(para)’에서만 포착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정된 순수한 원형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원형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부딪히며 변형되는 과정에서 새롭게 끊임없이 생성되는 앎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아틀라스 므네모시네>의 이미지들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 그 위치를 바꿔 배치할 수 있게끔 기획된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파라탁시스’(parataxis, 다나카 준), ‘몽타주’(montage, 디디-위베르만), ‘패러다임 혹은 유비적 인식’(아감벤) 등은 바르부르크의 <므네모시네 아틀라스>가 암시하는 이 같은 사유 방식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우리는 이 모든 말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염두에 둔 채 '아틀라스'는 '지도'가 아닌 '지도책'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환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도책은 하나의 지도만이 아닌 다른 지도들이 함께 들어있는 것이며, 하나의 지도에 또다른 지도를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 속에 보이지 않는/씌어지지 않은 길들을 볼 수/읽어 낼 수 있게 해준다. 종교를 다루면서 우리는 지도가 가리키는 원본으로서의 땅, 고정된 땅과 길들에만 너무 주의를 기울였는지도 모른다. 바르부르크의 <아틀라스 므네모시네>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엘리아데의 『종교형태론』 목차 속 항목들을 모두 펼쳐놓고 그 항목 각각을 자유롭게 다른 항목 옆으로 이동시키며 무수히 많은 다른 연결선들을 만들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디테일에 대한 천착과 서로 다른 것들 - 서로 다른 사물들, 서로 다른 이미지들을 연결시키는 상상력은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요청된다.

 


* 이 글의 내용 중 일부는 2020년 11월 서울 보안여관의 <이미지 인류학: 아틀라스 므네모시네> 전시 연계 학술포럼에서 발표한 것이며 이후 출판될 도록에 실릴 예정임을 밝힙니다.











 


최화선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최근 논문으로 <“씌어지지 않은 것을 읽기”: 점술의 사유와 이미지 사유>, <이미지와 응시:고대 그리스도교의 시각적 신심(visual piety)>,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 남장여자 수도자들과 젠더 지형>, <기억과 감각: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의 순례와 전례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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